[동아광장/황호택]˝나는 닭갈비를 좋아해˝

  • 입력 2002년 7월 15일 18시 45분


저녁 식탁에 가족이 둘러앉아 통닭구이를 먹을 때 누군가는 닭갈비(계륵)를 먹어야 한다. 살이 적고 맛도 떨어지는 닭갈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인간 관계를 연구하는 학자 데보라 탄넨(미국)에게 이혼한 남자가 찾아와 닭갈비를 좋아하던 전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닭갈비는 매번 그의 아내 몫이었다. 아내는 닭갈비를 집어들며 가족들이 미안해 할까봐 언제나 “나는 닭갈비를 좋아해”라고 말했다.

이혼남은 흥미롭게도 이혼의 원인을 아내의 닭갈비 선호 증상에서 찾았다. 아내는 사랑하는 가족에게 살이 많고 맛있는 닭다리와 날개를 늘 양보했다. 노른자위가 깨진 달걀프라이와 실수로 태운 토스트도 아내 차지였다. 그러나 끝없이 거듭되는 양보와 희생을 통해 아내의 좌절이 축적됐고 결국 이혼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여성 총리는 안된다?▼

옛날 한국의 어머니들도 좋은 음식은 시아버지 남편 자식에게 양보하고 항상 불편한 자리에서 식은 밥과 신 김치를 먹었다. 우리 사회에서 칭송 받던 현모양처 상도 탄넨의 분석에 따르면 좌절을 축적하는 닭갈비 선호 증상에 불과하다.

한국은 아직도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이슬람국가 다음으로 뒤진 나라다. 식탁의 남녀평등은 오래 전에 확보됐지만 일자리 배분의 남녀평등은 요원하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시도지사에 여성이 한 명도 없고 시군구청장은 겨우 두 명이다.

여성들은 대학을 나와도 일자리가 극도로 제한돼 있다. 학창시절에 남학생들과 앞뒤를 겨뤘던 여성이 고학력실업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좌절감의 깊이를 당사자가 아니면 측량하기 어렵다. 사회적 성취가 부족한 고학력 전업주부들이 돈과 시간의 여유를 자녀교육에 쏟아 부어 대리 성취를 추구하면서 입시과열현상이 생긴다는 분석도 있다.

김대중 정부에서 헌정사상 첫 여성 총리서리가 탄생했다. 한나라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한 국회에서 순탄하게 임명동의를 받기 위한 전략이라는 풀이가 나오고 여성총리가 빛을 발할 수 있었던 시기를 그냥 흘려보내다가 임기 7개월을 남겨놓고 여성 총리를 임명한 것을 두고 생색내기라는 비아냥거림도 들린다.

본격적인 언론의 검증과 함께 아들의 국적, 학력 기재, 친한 교수들과 공동으로 취득한 땅과 관련한 시비 등이 터져 나오면서 첫 여성 총리의 신선함이 다소 퇴색하는 느낌이다. 국회인사청문회가 만만치 않을 것 같다.

페미니스트들은 임명직은 물론 선거를 통해 진출하는 고위공직에 여성들이 더 진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스스로를 엄격하게 관리하며 고위공직에 준비된 여성의 수가 적은 것도 현실이다. 최고의 여자대학 총장을 지낸 장상 총리서리가 “총리가 될 줄 알았으면 아들에게 미국 국적을 선택하도록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한 말은 여성의 고위직 진출과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여성들 스스로 ‘나는 닭갈비를 좋아해’라고 자위하는 좌절에 익숙해 선뜻 닭다리와 닭날개를 집어들 태세가 덜 돼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부 논객들이 헌정사상 첫 여성 총리를 환영하기에는 총리직이 ‘너무 중차대한 자리’이고 장 총리서리가 정치나 행정에 익숙한 인물이 아니라고 비판하는 논리에 대해서는 수긍하기 어렵다. ‘너무 중차대한 자리’는 항상 남성들이 해야 한다는 말인가. 제왕적 대통령 아래서 총리직이 어느 정도 중차대할지는 모르겠으나 외국에는 여성 대통령과 여성 총리가 흔하다.

김무성 한나라당 의원이 대통령 유고시 국방을 모르는 여성 총리에게 어떻게 국방을 맡길 수 있느냐고 한 발언도 망발이다. 마거릿 대처 총리 시절의 영국은 국방을 포기했다는 말인가. 대처 총리는 82년 10주 동안 포클랜드제도를 점령했던 아르헨티나와 전쟁에서 과단성 있는 지도력으로 탈환에 성공해 83년 총선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험난한 편견과의 싸움▼

김상협 이현재 현승종 이영덕 이수성씨는 대학 총장 출신으로 국무총리가 됐다. 남성 총장이 총리가 될 때는 별 말이 없다가 여성 총장이 총리가 되니 행정 경험이 없다고 탓하는 것은 성차별 의식에 다름 아니다.

이 정부에서 총리 자리는 지금까지 자민련 몫이었다. 비록 7개월짜리 총리이기는 하지만 공동정부의 고리가 풀린 후 첫 번째 임명되는 총리에 여성을 앉힌 것은 의미가 적지 않은 정치 실험이다.

남성들의 편견과 우위가 강세를 떨치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은 지도자가 되기도 어렵고 일단 검증의 문을 통과하더라도 가야할 길이 험난하다. 한국에서 여성의 지위와 관련해 장 총리서리는 매우 중요한 실험의 대상이 돼 있다.

황호택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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