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전진우]총 쏘고 배 뜨고

  • 입력 2002년 7월 5일 18시 43분


서해에서는 총격전이 벌어지고 동해에서는 금강산 관광선이 뜬다. 이것이 2002년 여름 남북 공존(共存)의 모습이다. 세계 유일의 분단지역인 한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모순된 공존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공존의 전제는 평화다. 평화 없는 공존이란 거짓이다. 그렇다면 지금 남북은 거짓 공존을 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다음 순서의 물음은 이럴 것이다. 그따위 거짓 공존은 깨면 될 것 아니냐고. 배은망덕(背恩忘德)도 분수가 있지 일껏 도와줬는데도 뒤통수나 치는 상대에게 언제까지 질질 끌려갈 것이냐고. 감정의 논리로는 틀리지 않은 말이다. 그러나 남북관계란 요즘 젊은 부부들이 이혼장에 도장 찍듯 그렇게 간단히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속을 있는 대로 끓이면서도 자식들 생각해 참고 살던 예전 우리네 어머니들처럼 고통스러운 인내가 요구된다. 우리가 언젠가 통일의 주체가 되어 북의 동족을 끌어안아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면 분노를 삭이는 참을성이 필요하다.

▼햇볕정책 문제점 인정해야▼

하지만 인내에도 원칙의 한계는 있는 법이다. 원칙도 없이 참기만 한다면 그것은 인내가 아니다. 굴종이다. 김대중(金大中) 정부가 내세워온 햇볕정책의 골간은 남북 평화공존이다. 그런데 북측이 평화를 깼다. 기만적 공존만 남은 셈이다. 그렇다면 김대중 정부는 햇볕정책의 오류를 인정하고 문제점에 대한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햇볕정책 말고 뭐가 있겠느냐고 목청을 높일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남북현실에서 무엇이 대안이 될 수 있을지 국민과 함께 고민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그 같은 진지한 모색의 과정에서만이 국민의 인내를 요구할 수 있다.

6·29 서해교전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우선 북측의 도발이 의도적이냐 우발적이냐는 점이다. 북측 경비정은 경고방송을 하던 우리 측 고속정을 85㎜ 함포로 기습 사격했다. 미리 쏘기로 작정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 군사전문가들의 말이다. 의도적이었다는 결론이다. 다음은 ‘의도성의 수준’이다. 즉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을 정점으로 한 북한지휘부의 의도냐, 3년 전 연평해전 패배에 앙갚음하려는 북측 서해함대사령부 차원의 의도냐는 것이다. 우리 정부는 아무래도 후자의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싶어하는 듯하다.

이상한 점이 있기는 하다. 북측은 서해교전 이틀 후 한국과 터키의 월드컵 3, 4위전 경기를 녹화 중계했다. 해설자는 이을용 선수가 프리킥으로 골을 넣는 장면에서 ‘높은 기술’이라고 칭찬까지 했다. 북측은 또 우리의 월드컵 선전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는가 하면 25명의 북한 경수로 핵안전 규제요원을 교육 예정에 맞춰 남한에 내려보냈다. 연평해전 직후 ‘복수 결의대회’를 여는 등 대남(對南) 비난에 열을 올리고 남측 인원의 평양방문 및 접촉을 금지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다. 어쨌거나 북의 이중성에 휘말려 의도성을 희석시킬 수는 없다.

더욱 본질적인 의문은 북측이 이번 도발로 무엇을 얻을 수 있느냐는 점이다. 체제 안정성 강화를 위한 대내용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대내용이라면 월드컵을 녹화 중계하고 축하 메시지를 보내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핵안전 규제요원을 내려보낸 것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대미(對美) 협상력을 강화하기 위해 도발했다? 이는 북측이 핵과 미사일, 재래식무기 문제 등에 대한 미국의 압박을 피하기 위해 북방한계선(NLL) 문제를 새 이슈로 만들어 협상의 주도권을 잡으려 했을 것이란 해석인데 역시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런 식의 ‘벼랑끝 전술’이 조지 W 부시 정부에도 먹히리라고 오판할 만큼 평양 정권이 어리석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은 당장 대북(對北) 특사 파견을 철회했다. 특사 파견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쪽은 한국 정부였을 뿐이다.

▼‘치고 빠지는 식’ 대화는 안돼▼

평양 정권이 미국의 압박으로부터 시간을 벌 수 있게 된 성과는 올렸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단지 시간을 벌 요량으로 무력도발을 했다? 이 또한 납득이 안 되는 추론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이렇듯 상식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북의 행태를 두고 자칫 남측의 국론분열이 우려된다는 점이다.

북측은 다시 어물어물 대화를 통한 해결을 들먹인다. ‘치고 빠지는 식’이다. 이런 식으로는 안 된다. 대화를 하려면 서해 만행에 대한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이 선행돼야 한다. 군사적 신뢰가 결여된 햇볕정책으로는 더 이상 국민의 인내를 요구할 수 없다. 남북 군사당국자간 회담을 열어 도발을 방지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총 쏘고 배 뜨는 공존은 공존이 아니다. 거짓 공존은 지속될 수 없다.

전진우 논설위원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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