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규민]공약을 안 지켜야 하는 이유

  • 입력 2002년 6월 14일 19시 09분


90년대 중반 폴란드의 노조지도자 레흐 바웬사는 대통령 선거운동 과정에서 기발한 공약을 내걸었다. 당선되면 국영기업을 몽땅 팔아 그 돈을 전체 국민에게 한사람당 1억즈워티씩 고루 나눠주겠다는 것이었다. 우리 돈으로 약 800만원 정도 되는데 얼마나 많은 유권자들이 여기에 넘어가 그를 선택했는지는 알 수 없으되 어쨌든 그 공약은 지켜질 리 만무한 것이었다. 당선 후 돈을 못 받은 한 시민이 그를 고발했을 때 법원은 바웬사에게 유죄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다행이라면 바웬사가 법적 처벌을 받았을망정 공약을 실천해 나라경제를 망하게 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무리한 공약 강행땐 주민 고통▼

약속은 지켜야 한다. 그러나 당선자가 공약을 실천할 때 그것이 유권자에게 해를 주는 것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또 해로운 결과를 알면서도 공약을 지키겠다고 고집한다면 그것처럼 골치 아픈 일도 없다. 엊그제 끝난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앞두고 후보들이 유세장마다 토해 놓은 공약들을 모아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공약 전체를 부정하거나 건전한 실천노력을 폄훼하자는 말이 아니다. 단지 당선자가 만에 하나 허황된 공약들을 실천하겠다고 나설 경우 빚어질 재앙이 고스란히 그를 찍은 시도민들의 몫이 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실현 가능성과 사업의 필요성이 입증되지 않는 환상적 공약일수록 그것이 추진될 때 빚어낼 부작용은 비극적이다. 하기야 지난번 선거에서 뽑힌 지자체장들의 공약이, 임기상 마감시간이 다 된 지금까지 지켜진 게 겨우 12%라든가 하니까 그런 일을 걱정하는 것이 기우일 가능성은 높다.

어느 경제연구소가 이번 지방선거 과정에서, 그것도 광역단체장의 경우만 모아서 따져 보니까 당선자가 내놓은 공약을 완벽하게 실천하려면 평균 90년이 걸리고 여기에 필요한 자금을 계산해 보면 우리나라 전체 한 해 예산의 17배나 된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역시 대한민국의 믿지 못할 사람들은 모두 정치판으로 몰렸다는 얘기인가.

구청이 대학을 설립하고 대중교통수단의 요금을 무료화하며 아파트를 반값에 공급해 주겠다는 식으로 꽃가루 뿌리듯 유혹한 것까지는 좋지만 그걸 지키는 데 쓰일 자금이 바로 주민들 호주머니에서 나와야 한다는 단서를 언급한 후보는 단 한명도 없다. 그래서 헛공약에 홀려 표를 던진 주민들은 당선자가 약속을 지킬 때 지금보다 수십배 많은 세금을 내야 한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 않는다. 공약을 지킨다며 아까운 세금으로 농공단지를 짓고 필요도 없이 바다를 매립했다가 텅빈 땅에 관리비만 쏟아 붓게 만들어 주민들 생활을 더 핍박하게 한 시장 도지사들이 지금도 멀쩡하게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우리 정치의 현실이다.

그래도 지역개발에 대한 공약은 낫다. 지방자치단체장이 나라 경영에 관한 주제 넘는 공약을 한 경우는 또 어떤가. 공장이 선거구 내에 있다고 해서 하이닉스반도체의 해외매각을 저지하겠다고 호언장담한 경기도지사 후보들의 코미디 같은 공약은 선거판에서 표만 준다면 부모까지 팔 사람들의 헛소리쯤에 해당한다. 경기도지사가 이 회사의 해외매각 여부를 결정할 권한이 티끌만큼도 없다는 사실은 상식 중의 상식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당선자가 노조와의 약속대로 하이닉스를 독자 생존시키는 길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경기도가 한 해 예산 10조원을 몽땅 들어다 4년 동안만 채권단에 물어주면 급한 불은 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얼토당토않은 공약을 지키기 위해서 경기도민들이 새 도지사 임기 내내 복지를 포기하고 소득이 사라지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면 그 공약은 지키는 것이 옳은 일인가.

▼대선후보 국민 들쑤시지 말라▼

이제 지방선거는 끝났지만 더 큰 걱정은 연말에 있을 대통령선거다. 대선 후보들이 지방선거 후보자들보다 더 신뢰성 있고 실현 가능한 공약들을 내놓을 것이라는 기대는 일찌감치 거두는 것이 좋을 성싶다. 이미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공약들 중에는 ‘바웬사’스러운 공약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이 속이고 속는 게임은 유권자인 국민이 당선자들의 헛공약을 망각하거나 식언을 용서해 왔기 때문에 끝없이 반복되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후보들만 나무라기도 민망한데 그런 전제로 후보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 하나가 있다. 제발 헛된 기대를 국민에게 심기 위해 온갖 계층을 들쑤셔 놓지나 말라는 것이다. 그들의 공약 때문에 선거도 하기 전에 국민이 계층간 이념간 대립상태로 분열된다면 그 후유증은 공약을 안 지켰을 때의 해악보다 훨씬 더 클 수 있기 때문이다. 헛공약이 가져올 정치적 몸살이 요즘처럼 걱정되는 때도 없다.

이규민 논설위원실장 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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