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과 사람]'아프리카의 지붕' 킬리만자로산

  • 입력 2002년 5월 17일 14시 21분


사흘 걸려 올라온 4500m 높이의 산 속에서 가장 높은 주봉(5895m) 키보를 바라본 모습이다
사흘 걸려 올라온 4500m 높이의 산 속에서
가장 높은 주봉(5895m) 키보를 바라본 모습이다

킬리만자로는 구름 위에 성채처럼 솟아 있다. 흰 눈에 덮인 주봉 키보 정상은 적도의 햇살을 받아 반짝거린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나는 꼭대기(헤밍웨이)'이기도 한 '아프리카의 지붕'은 태양과 흑빛 대륙 속의 만년설이라는 역설로 자신을 신비와 경외의 베일로 감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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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리만자로 주변 주민들에게 킬리만자로는 더욱 범접키 힘든 성산(聖山)이다. 이름부터가 '신령한 산'을 뜻하듯, 원주민들은 "저 산에 올라가면 목숨을 잃는다"고 믿어왔다. 산은 그렇게 수천년간을 깊은 어둠 속에 닫혀있었다. 그러나 킬리만자로는 이제 넓은 품을 열고 있다. 자신을 정복 또는 찬미하러 오는 이들을 친절하게 두 팔 벌려 맞고 있다.

5895m, 아프리카의 정점에 자신의 '깃발'을 꽂으려고 오는 사람들. 배낭을 메고 등산화 신고, 그리고 가슴 속에 맹렬한 도전심을 갖고 찾아오는 이들에게 킬리만자로는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마음 속의 '극지'다.

킬리만자로 전경
킬리만자로에서 북쪽으로 50km 가량 떨어진 암보셀리 국립공원에서 바라본 킬리만자로의 전경. 흰구름 위에 떠 있는 듯한 자태가 신비감을 자아낸다.

4월 중순에 찾은 주 등산로 입구인 마랑구는 관광객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한산했다. 비가 많이 내리는 우기인 탓. 건기인 1∼2월과 6∼10월에는 하루에도 수백명이 이 산을 오르내린다. 공원 관리소 기록으론 이곳을 찾는 외국인이 연 2만6000명 안팎에 이른다. 폴란드 호주 미국 등 세계 각국에서 온 이들은 직업도 엔지니어 타이피스트 교사 등 다양하다. 하나같이 평범한 이들이다.

킬리만자로 원시림

그런데, 왜 킬리만자로인가. 킬리만자로는 세계 5000m이상 산 가운데 보통 사람이 올라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산이기 때문이다. 완만하고 거칠지 않은 등산로는 60대 할머니의 등정도 허락할 만큼 '순한 산'이다. 구름 위의 만년설을 밟아보고 싶은 사람들,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도전해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킬리만자로는 더할 나위 없는 유혹이다.

그러나 킬리만자로는 '두 얼굴'의 산이다. 등정에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이 4박5일인 것은 쉽게 다가서게는 하지만 좀처럼 문을 열어주진 않는 자존심의 표현이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나무들의 키가 작아지면 그와 함께 공기도 희박해진다. 동시에 산을 오르는 이의 내면의 싸움도 치열해진다. 포터들은 연신 "폴레폴레"라고 소리친다. '천천히'라는 뜻의 스와힐리어는 킬리만자로의 등산수칙 제1호다. 3000m를 넘으면 나타나기 시작하는 고산병은 킬리만자로가 보내는, '천천히, 그리고 겸손하라'는 주문이다.

3780m 호롬보 산장 벽의 낙서들은 지끈거리는 머리가 내뱉는 비명이자 토로들이다. "왔노라 보았노라 올랐노라"라는 감격의 문구와 함께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불안. 킬리만자로는 이들 모두에게 '나를 정복하려면 먼저 너 자신을 이겨라'는 걸 가르쳐주는 도장(道場)이다.

킬리만자로는 이방인들에게는 정복의 대상이지만 그 주변의 사람들에겐 생계의 터전에 다름아니다. 이들은 등산객들을 상대로 한 포터와 가이드 일로 '많은' 수입을 올린다. 등산객의 짐을 두세개씩 메고 산을 타는 건 보는 사람이 안쓰러울 정도로 고된 일이다. 그렇게 일하고 손에 쥐는 건 하루 10달러 정도. 그러나 가난한 이들에겐 그것도 최고의 일거리다. 1년에 50일 가량을 킬리만자로에서 보낸다는 프랭크는 "일자리를 주는 킬리만자로는 신의 선물"이라고 말한다. 킬리만자로는 산 주변에도 기름진 토질을 선물했다. 킬리만자로 커피로 유명한 커피농장들과 바나나 농장들이 일대에 널리 퍼져 있다.

탄자니아 정부가 1973년부터 킬리만자로 일대를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고 철저히 보살피는 것도 킬리만자로로부터 얻는 그같은 혜택들을 길이 보전하려는 것이다. 60∼120명이 묵을 수 있는 3개의 산장을 만들어 입산객 숫자까지 철저히 통제한다. 산장은 태양열로 가동되는 발전기로 땔감 문제를 해결하는 등 산의 한 터럭이라도 훼손하지 않으려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산장은 산 속의 작은 세계다. 각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금세 친구가 돼 어울린다. 평화로운 풍경.

하지만 그 평화의 이면, '인간의 질서'는 엄연하다. 백인들이 음식을 먹고 즐기는 동안 흑인들은 그 옆에서 그들을 위해 시중을 든다. 저 아래 지상에서 그렇듯이.

어둠에 잠긴 킬리만자로에 비가 내린다. 빗줄기는 산장의 나무지붕을 때린다. 그리고 '슬픈 아프리카'의 상념에 젖은 이방인의 가슴에도 쏴하고 쏟아져 내린다. 그건 킬리만자로의 눈물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땅에서 태어난 아프리카 흑인들을 위해 흘리는 눈물인지도.

킬리만자로=사진 권주훈기자 kjh@donga.com

글 이명재기자 mj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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