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최화경/회혼(回婚)

  • 입력 2002년 5월 15일 18시 52분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임금이 회혼(回婚)을 맞은 신료를 축수하는 대목이 나온다. ‘영조가 회혼례를 치른 황준에게 미포(米布)를 하사했다’ ‘철종이 회혼을 앞둔 홍제주에게 사관을 보내 존문(存問)하도록 하교했다’는 내용 등이다. 100여년 전까지만 해도 평균수명은 35세를 넘지 못했다. 당시의 조혼 풍습을 감안하더라도 결혼 60주년인 회혼을 맞으려면 부부가 모두 일흔을 넘겨야 하는데 이는 기적에 가까웠다. 그랬기에 우리 선인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수많은 통과의례 가운데 회혼을 으뜸으로 쳤다. 벼슬아치나 양반이 아닌 서민이 회혼을 맞아도 고을 수령이 손수 찾아가 축수한 것은 그래서였다.

▷혼인과 관련된 경사가 회혼 하나뿐인 우리와는 달리 서양은 매우 다양하다. 결혼 5년까지는 지혼식(紙婚式)이니 목혼식(木婚式)이니 하며 해마다 다르게 부르고 이후에도 3년 또는 5년마다 따로 이름을 정해 놓았다. 우리의 회혼례는 서양식으로 하면 금강혼식(金剛婚式)이다. 그러나 서양 사람들은 이보다 50주년인 금혼식(金婚式)을 더 성대하게 치른다. 60년을 해로하기가 그만큼 힘들기에 아예 앞당겨 잔치를 여는 것일 게다.

▷의학이 발달해 남녀 모두 평균수명이 70세를 넘어선 요즘은 장수하는 부부가 많다. 기네스북에 올라 있는 세계 최장수 결혼생활 기록은 캐나다 부부가 세운 79년이다. 놀랍게도 우리의 기록은 이보다 더 길다. 제주도에 사는 102세의 이춘관옹은 올 2월 송을생 할머니가 97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80년을 해로했다. 회혼을 넘기고도 20년을 함께 더 살았으니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은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닐까. ‘부부 사랑은 주름살 속에 산다’는 서양 격언이 실감난다.

▷그래도 회혼맞이는 보통 부부에겐 아직 꿈같은 얘기다. 30세의 남자와 25세의 여자가 결혼해 함께 살 수 있는 기간은 40년 남짓이다. 그뿐인가. 세 쌍이 결혼하면 한 쌍은 이혼하는 것이 요즘의 세태다. 젊은 부부만이 아니다. 고운 정 미운 정 다 든 중장년 부부도 ‘초라한 더블보다 화려한 싱글이 낫다’며 갈라서는 세상이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황혼이혼도 더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회혼을 한 해 앞두고 등돌린 노부부까지 있었다. 그런 터에 구자경(具滋暻) LG그룹 명예회장 부부가 엊그제 회혼례를 치렀다는 소식이 들린다. 세상이 어떻게 변했든 결혼해서 부부가 60년을 함께 보낸다는 것은 진정한 축복이 아니겠는가.

최화경 논설위원 bb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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