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주식중독증 환자 늘어난다

  • 입력 2002년 2월 19일 14시 37분


주식 투자에 입문한지 7년째인 권모씨(55)는 증권사 지점 직원들에게 ‘기피 대상 1호’ 로 꼽힌다. 100만원 정도 입금된 계좌를 들고선 하루에도 수십번씩 매수 주문과 취소를 반복하기 때문. 주식을 일단 사고나면 주가가 조금만 오르내려도 마주치는 직원마다 붙들고 “팔아야 하는 것 아니냐” 며 전전긍긍한다.

직접 만든 종목 분석 노트를 들고 다니면서 “좋은 종목을 추천해 주겠다” 며 귀찮게 하는 탓에 다른 손님들도 권씨를 피한다. 권씨에게 이같은 버릇이 생긴 것은 3년전 여윳돈 1억원과 집을 담보로 빌린 돈까지 주식으로 날리고 나서부터.

울산의 한 주부는 지난해 남편 몰래 주식을 하다가 이혼 직전까지 내몰렸다. 2억원을 잃은 것도 문제였지만 매일 객장에 나가느라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은게 화근이었다. 이 주부는 주식시장이 문을 닫은 저녁 시간에도 시세판만 떠올라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그러다 행동이 달라진 점을 수상히 여긴 남편의 추궁에 주식투자를 한다는 사실이 들통나버렸다.

주식 중독자가 늘고 있다. 주식 중독에 대한 사회적 우려가 생겨난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사이버 거래가 확산되면서 폐해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사이버거래 확산으로 중독자 급증= 자영업자인 김모씨(35)는 늘 차에 만화를 가득 싣고 다닌다. 하루 종일 컴퓨터로 주식시장을 들여다보다가 장이 끝나고 나면 불안하고 허전해서 무엇이든 봐야한다는 것. 김씨의 불안은 다음날 오전 9시 시장이 열리면 씻은 듯이 사라진다.

하용현 현대증권 투자클리닉 원장은 “클리닉을 찾는 사람들 대부분이 ‘하루라도 주식을 안보면 불안하다’ 는 말을 한다” 고 전했다. 지난해말 상담을 받은 현모씨(45)는 “추석 연휴가 너무 길게 느껴졌다” 고 털어놨을 정도. 현씨는 매일 한 번 이상 사이버 거래를 하다 주식 투자 1년만에 원금의 80%를 손해보고 나서 클리닉을 찾았다.

최근에는 주식거래 전용 휴대단말기(PDA)가 보급되고 휴대전화를 이용한 거래가 확산되면서 투자자들의 조급증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단말기로 주식정보가 전해지면 밥을 먹다가도 확인을 하고서야 밥을 넘길 수 있다는 투자자도 있다.

하원장은 “인터넷을 통해 정보가 실시간으로 유통되는 것도 중독자 증가의 한 원인” 이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사이버거래 중독 증상으로 △틈만 나면 주식 사이트를 본다 △거래에 몰두하다 중요한 업무나 약속을 잊어버린 적 있다 △거래를 하느라 가족이나 직장 상사에게 거짓말을 해본적 있다 등을 꼽는다.

▽심하면 다른 장애 유발= 주식 중독증이 심해지면 다른 장애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 ‘주식중독증 집단의 심리적 특성’ 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경희의료원 신경정신과 반건호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주식에 중독된 투자자들에게서는 신체의 특정 부위가 아프다고 느끼는 신체화 성향을 비롯해 강박성향 우울증 적대감 공포 편집증 등이 정상적인 투자자들보다 심하게 나타났다.

전문의들은 정신과 질병 가운데 하나인 ‘충동조절장애’ 로 주식중독증을 설명한다. 충동조절장애의 대표적인 것은 도박 중독. 일상 생활에 지장을 느끼면서도 도박을 계속하게 되고 도박을 중단하면 금단 증상을 느끼는 것으로 주식중독이 심하면 이와 비슷한 지경에 이른다는 지적이다.

광주 조선대병원 정신과 박상학교수는 “주식중독증이라는 병명은 학술적 용어는 아니지만 주식 때문에 병원을 찾는 환자들을 보면 병적이라고 할 만하다” 고 말했다. 밤낮없이 주식에 매달리던 주부가 어느날 갑자기 불면과 불안에 시달리더니 울다가 웃다가를 반복하는 바람에 가족의 손에 이끌려 입원한 경우가 있었다.

잘 나가던 한 치과의사는 주식에 중독되면서 환자도 뒷전으로 미루다가 급기야는 본업과 부업을 바꿔버릴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깡통 계좌가 되고나서 술로 세월을 보내다 우울증과 알코올로 인한 간기능 장애를 치료받았다.

▽주식 중독에서 벗어나려면= 치유법은 다른 중독의 경우와 비슷하다. 우선 출발점은 스스로 중독임을 자각하는 것. 반건호교수는 “도박이나 알코올 중독만큼 육체와 정신에 미치는 피해가 심각한데도 주식 중독자들은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다” 며 “주식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어떤 형태로든 지장이 생긴다면 중독을 의심해봐야 한다” 고 지적했다.

중독에서 벗어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원론적이긴 하지만 주식을 당장 그만두는 것. 박상학교수는 “그만두는게 힘들면 주식 이외의 관심거리를 만들어 주식을 생각하는 시간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 고 조언했다. 박교수는 또 “알코올이나 도박 중독을 환자 스스로가 끊는게 어려운 것처럼 주식중독도 스스로 조절하는게 사실상 힘들다” 면서 “문제점을 인식했다면 전문가를 찾거나 주변의 도움을 구하는게 좋다” 고 충고했다.

금동근기자 gold@donga.com

<주식중독 자가진단 체크리스트>

1. 하루라도 주식시장을 보지 않으면 불안하다

2. 주가를 보고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3. 주식투자를 위해 과도한 시간을 보낸다고 생각된다

4. 주식 생각 때문에 가족과의 대화에 몰두하지 못할 때가 있다

5. 장 종료 후에도 계속 주가가 생각난다

6. 주말이 빨리 지나기를 바란다

7. 매매를 중단하려고 했으나 실패한 적 있다

8. 주식 때문에 초조함 신경질 등 정신적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매매한 적이 있다

9. 주식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느낀 적 있다

10. 주식 매매를 위해 중요한 일이나 여가활동을 포기한 적 있다

<평가>

△2개 이하 해당: 경미한 중독증세

△3∼5개 해당: 중독

△6개 이상 해당: 중독증세 심각

자료제공: 현대증권 투자클리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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