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대통령 전용차는 최고급 차량에 각종 편의시설까지 갖추고 있지만 100년 전 자동차야 뻔한 수준이다. 또 나라님 행차는 으레 사두마차 뒤로 문무백관이 따르고 장중한 풍악으로 위엄을 갖춰야하는 것으로 알던 시절, 시끄럽고 채신머리없이 덜컹거리는 자동차가 고종의 마음에 탐탁지 않았던가 보다. 그래서인지 ‘1호 어차’는 궁궐 한구석에 처박혀 신료나 궁인들의 구경거리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다 이듬해 러-일전쟁 때 불에 타 없어졌다.
▷한일합병 후 일본 총독부는 왕실을 달래느라 미국 GM사의 캐딜락 리무진을 순종의 어차로 바쳤다. 그러나 일제에 대한 반감 때문인지 순종도 거의 타지 않았다고 한다. 반면 순종의 아우 의친왕은 요즘으로 치면 ‘자동차 마니아’였다. 자전거가 도입되자마자 이 희한한 ‘탈 것’을 몰고 다니더니 GM 오버랜드를 구입하고부터는 활달한 성격만큼이나 신나게 도성 안을 누벼 장안의 화제가 됐다는 얘기다. 눈치를 보던 다른 왕족과 대신들도 이때부터 슬금슬금 자동차를 샀다고 하니 이 땅의 자동차 문화 선구자가 바로 의친왕이었던 셈이다.
▷순종과 순종비가 타던 어차가 5년간의 복원작업을 마치고 그저께 창덕궁에서 공개됐다. 순종의 어차는 앞에서 말한 1918년식 캐딜락이고 순종비의 어차는 영국 다임러 라운드 1914년형이다. 특히 순종의 어차는 당시 20대밖에 만들지 않은 데다 지금 세계에 남아있는 게 단 4대뿐이라니 호사가들이 몰릴 만도 하다. 하지만 화려한 외양에 탄복하기만 할 일이 아니다. 이 차에 서린 순종의 ‘저항정신’을 함께 읽어야 한다. 문화재청이 10억원이 넘는 거금을 들여 굳이 복원한 이유는 거기에도 있을 게다.
<최화경논설위원>bb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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