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충식]페샤와르, 그 아이들

  • 입력 2001년 9월 24일 18시 31분


A기자에게.

페샤와르 취재는 잘되고 있습니까.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을 앞두고 세계의 기자들이 거기, 파키스탄 북부 페샤와르와 퀘타에 몰려 있다면서요. 이윽고 전쟁이 시작되고 포성이 울리면 아프간을 탈출한 난민들도 만나고 취재하게 되겠군요.

페샤와르에서의 아뜩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86년 내가 이슬라마바드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페샤와르 부근의 아프간 난민촌에 갔을 때였습니다. 현장은 상상을 넘어서는 ‘나락’이었습니다. 파키스탄으로 도망친 아프간 난민은 79년 구소련의 침공 이래 늘고 늘어 당시 총 260만명에 달한다고 했습니다.

▼아프간 난민의 삶 비극적▼

그 뿌리뽑힌 삶들이 천막촌에 낙엽처럼 뒹굴고 있었습니다. 노숙자, 그들의 이국 삶이 바로 그런 것일까요. 천막 음식 옷 살림도구 연료, 나아가 마실 물, 구급의료에 이르기까지 생명을 이어가고 존엄을 말하기엔 배급품은 모자라고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급식규정에는 어른 한 사람에 하루 곡물 500g, 우유 30g, 식용유 30g, 그런 식으로 짜여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대로라고 믿는 이는 없었습니다.

난민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아이들 교육이었습니다. 영양실조로 일그러진 아이들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글자와 셈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책상 걸상이 있을 리 없습니다. 교사는 따로 교육을 받은 것도 없이 난민 중에서 뽑힌다고 했습니다. 교육과정을 밟아 위로 올라가려야 갈 데도 없었습니다.

취재를 마치고 헬리콥터에 올라탔습니다. 프로펠러가 돌고 이륙을 시작하자 빙 둘러서서 지켜보던 난민 아이들이 일제히 몰려들며 헬리콥터를 향해 손을 내밀었습니다. 통제병들이 제지하고 경고 호루라기가 울렸지만, 우리 헬기가 서있던 자리는 새카만 아이들의 파도로 메워지고 말았습니다. 마치 천상을 향해 구원을 호소하듯 아이들은 소리치면서, 헬기를 향해 끊임없이 손을 흔들어댔습니다.

하늘로 솟구친 나는 마치 아수라의 비극을 혼자서 탈주하는 기분이 되었습니다. 뭔가를 배신하고 혼자서 도망치는 듯한 부끄러움. 이슬라마바드로 향하는 귀로 내내 나는 우울했습니다. 그 기억을 좇아 오늘날 파키스탄의 아프간 난민 수를 알아보니 아직도 200만명입니다.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 자료입니다.

그렇다면 소련군 철수 이후에도 부초(浮草)인생은 대부분 청산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됩니다. 내전이 계속되는 아프간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파키스탄에서 자립하기도 어려우며, 열악한 교육으로 빈궁한 대대를 이어가는 악순환이겠지요. 이제 미국의 공격이 시작되면 다시 목숨을 건 탈출이, 난민행렬이 파도처럼 밀려들어 그 수는 더 늘겠지요.

오늘도 미국의 전쟁 다짐을 듣습니다.‘무한정의(無限正義)’를 외치며 ‘미국편인지, 테러범편인지 선택하라’고 세계에 강요합니다. 아프간에 있을 테러 모의자들과 그 비호세력인 탈레반정권이야 죄값을 치르는 것이 되겠지요. 그러나 전쟁의 불꽃에 데고 총포에 상처 입을 아프간 양민들의 처지를, 고국을 등질 무고한 난민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9월11일 테러범의 여객기에 동승했던 무고한 사람들, 세계무역센터 빌딩에서 커피를 마시던 애꿎은 사람들. 그 선량한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테러라는 불의를 뿌리뽑고, 평화를 담보하기 위해 전쟁이 시작되려 합니다. 그러나 뉴욕의 무고한 죽음을 해원(解寃)하기 위해 아프간의 무고한 삶들이 뿌리뽑히는 건 역설 아니겠습니까.

미국인들은 그 테러사태 이후 성조기를 수없이 사들이며 애국심을 불태우고 있습니다. 반대로 이슬람권 도처에서는 ‘오사마 빈 라덴은 우리 영웅’이라는 플래카드를 치켜들고 반미 데모를 벌입니다. 세계의 최강국 미국의 자존심, 그리고 최고층 최첨단 빌딩을 무너뜨린 데 대해 환호하고 광적으로 자축합니다. 미국에서 6천수백명의 목숨을 빼앗고, 실직 소비급감 생산마비 기업가치손상 등 수천억달러의 경제 손실을 가한 광적인 테러에 갈채를 보냅니다. 데모 군중 가운데는 난민들, 자포자기의 삶들도 끼어 있지나 않을까요.

▼무고한 죽음 또 얼마나▼

A기자. 해 저물녘이면, 모스크(이슬람사원)에 기대어 종교와 인류의 갈등을 생각해 보세요. 구원과 평화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테러에 당하고, 전쟁으로 인해 내몰리는 애꿎은 사람들의 아우성과 신음 속에서, 우리 시대에 비롯된 것도 아니고 우리 시대에 끝날 것 같지도 않은 그 비극의 악순환을, 그 해답을….

김충식<논설위원>seesche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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