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규민/이슬람교도 수난시대

  • 입력 2001년 9월 19일 19시 22분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약을 넣었다’는 자작 유언비어에 흥분한 일본 군경은 6000여명의 재일동포를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시대를 건넌 역사의 응보라고나 할까,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의 하와이 진주만 공격이 발생하자 이번에는 ‘미국 본토 내 일본인들이 스파이 활동을 하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미국 내 일본인들의 참혹한 시련이 막을 올렸다. 상점들은 일본인의 출입을 금지했고 일본인 가게의 출입도 미국 정부의 허락을 받은 사람만 가능했다.

▷불행하게도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이듬해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그 유명한 ‘이그제큐티브 오더 9066’이라는 명령서에 서명함으로써 미국 땅의 일본인들은 사막에 세워진 수용소로 강제 이주되어야 했다. 3년여에 걸쳐 계속된 짐승 우리 같은 수용소 생활에서 12만명의 일본인이 얻은 것은 파괴된 가정과 황폐화된 정신뿐이었다. 20세기 중반,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미국 땅에서 재판 한 번 없이 이렇게 많은 외국인이 ‘집단 테러’를 당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새삼 경악할 뿐이다.

▷미국이 제2의 진주만 공격이라고 부르는 9.11 테러 사태 이후 이번에는 이슬람교도들의 수난이 시작됐다. 아랍인 외모를 가진 사람들을 향해 일부 성난 미국인들이 총격을 가하고 자동차로 들이받는 사건이 벌써 40여건이나 일어났다. 미국 내 이슬람교도들은 반테러 성명을 내고 테러 희생자를 위한 추모기도회도 열어 피해 국민의 환심을 사려 애쓰지만 미국인들의 속마음까지 돌리기가 아직은 역부족인 것처럼 보인다.

▷슬픔 속에서도 균형을 지키는 것은 지식인의 의무이자 특성이다. 진주만 때와 달리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비롯해 미국 내 지도층이 그 같은 비이성적 행동을 만류하기 시작한 것은 속뜻이 어디에 있든 역사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는 길이기도 하다. 증오의 신을 숭배하는 이슬람교도들이 공격의 대상이지 평화의 신을 믿는 대다수 이슬람교도에게 복수의 칼날이 겨눠져서는 안될 일이다. 미국인들의 의식이 진주만 사태 때보다 한결 성숙해졌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다.

<이규민 논설위원>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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