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충식]日 '제3의 개국'은 커녕

  • 입력 2001년 8월 13일 18시 20분


‘히로시마에 신형폭탄-상당한 피해’‘나가사키에 또 신형폭탄.’56년 전 8월 이맘때 아사히신문은 미군 비행기의 원자폭탄 공격을 그런 제목으로 보도하고 있었다. 8월6일, 9일 잇달아 떨어진 원폭의 위력은 일본 열도를 공포에 떨게 했다. 마침내 8월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다.

로마에 있는 바티칸 대사관에서 일하던 한 일본 외교관(대리공사)은 그 천황의 항복 소식을 들었다.

곧 귀국명령이 떨어졌다. 그것은 천황이나 군부, 외무성의 지시가 아니었다. 도쿄에 진주한 맥아더 사령부의 포고령이었다. 그러나 귀국할 길이 막연했다. 식구가 많은데다, 가난한 패전국 외교관 신세라서 비행기 값은커녕 뱃삯조차 마련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패전의 낙오 대열에서 외교관은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가진 밑천이라고는 유럽 전문 외교관으로 익힌 프랑스어 영어 해독능력. 그는 가족들의 목구멍에 풀칠을 하기 위해‘주재국’이던 바티칸에서 프랑스어 번역을 하며 지냈다. 뒤늦게 맥아더 사령부가 그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귀국편 비행기 탑승권을 보내준 것은 맥아더 사령부였다.

가나야마 마사히데(金山政英·97년 작고). 주한 대사(66∼72년)를 지낸 바로 그 외교관의 체험담이다. 한국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전혀 없이 서울에 왔다. 그러나 폴란드 대사 임명 석달 만에 날벼락처럼 떨어진 한국대사 인연으로 그는 친한(親韓)인사가 된다. 지금은 유골 일부가 경기 파주(坡州)의 천주교 묘지에 묻혀 있을 정도로.‘저 세상에서도 두 나라를 위해 일하고 싶다’던 유언대로다.

그 가나야마의 유명한 말이 있다.

“일본은 제3의 개국이 필요하다. 메이지(明治)유신이 제1의 개국이었다. 제2의 개국은 제2차세계대전(에 뛰어들고 패전한 것)을 통해서였다. 그리고 이제 필요한 제3의 개국은 아시아를 다시 수용하고 손잡는 그것이다. 전후 40년이 지났는데도 전후 처리가 제대로 안되어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최근 출판된 ‘김치와 우메보시’(예지출판사)에도 그런 대목이 나온다.

새로 일본을 이끌게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지켜보면서 다시 가나야마의 뼈저린 체험과 통찰을 생각하게 된다. 일본총리가 패전 56주년을 맞아 전후 처리는커녕, 역사인식의 전환은 고사하고, 아시아 나라들의 비난 경고까지 거스르며 굳이 전범 위령소를 찾는다는 뉴스를 들으면서.

일본이 저지른 전쟁으로 자국 외교관 가나야마도 그런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하물며 일본이라는 타국 이민족의 강압으로 전쟁에 내몰리고 징용에 희생당한 아시아 사람들의 비극, 그 터무니없는 피해는 더 말해 무엇하랴. 일본이 부른 재앙으로 분단된 한반도가 있고, 원폭 피해에 신음하는 사람들이 엄존하며, 일제에 압제당하던 민족들이 눈을 부릅뜬 채 오늘의 일본을 손가락질하고 있다.

고이즈미 정권은 가나야마가 말하는 ‘제3의 개국’과는 정반대로 가려 한다. 21세기의 일본을 정신적 쇄국(鎖國)으로 몰고 가려 한다. 그래서 고이즈미의 단순 명료하고 그래서 대중이 열광하는 박력있는 언동은 마치 2차대전의 제1전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그의 위패가 바로 야스쿠니에 있다)의 능란한 웅변 선동을 연상케 한다.

도조를 비롯한 A급 전범7인은 맥아더 사령부에 의해 처형되었다. 그러나 그들을 순국7사(殉國七士)로 추앙하는 우익이 있다. 그들은 전범묘역앞에 (전승 연합국의) ‘포학 비도(非道)한 이 복수는 마치 태고적의 야만행위 같다’고 적어 애도한다.‘오늘 일본의 평화와 번영은 지나(중국)사변과 대동아전쟁에서 수많은 희생자가 있었기 때문임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안내판을 적고 있다.

아직껏 그런 발상은 일부요 소수였다. 그러나 일본이 정치 경제적으로 침체와 좌절이 거듭되는 지난 10여년간 열도의 울분과 탄식은 이상한 응집으로 이어지고, 불길한 돌파구를 열어 가는 양상이다. 교과서 왜곡과 고이즈미 현상이 그것을 대변한다. 국수(國粹)주의는 늘 내부적 불만과 모순으로 분출되어 결국 망국 같은 대재앙을 부른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역사에서 우리는 보았다. 참으로 고이즈미총리의 일본을 걱정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김충식<논설위원>seesche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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