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일수/지식인이여 입을 열어라

  • 입력 2001년 8월 9일 18시 47분


양들이 침묵하는 까닭은 목자의 휘파람 소리가 그쳤기 때문이다. 위기를 알리는 목자의 휘파람 소리가 그칠 때 저 어두운 들녘에서 침묵하는 양떼들은 소리 없이 죽음으로 내몰리기 십상이다. 그래서 목자는 밤낮 없이 깨어 있어야 한다. 깨어 있어 양들의 울음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요즘 들어 소란스러운 정치현실과 부딪치면서 오히려 정치에 말없는 김대중 대통령의 속내를 놓고 측근들조차 애를 태우고 있다는 동아일보 기사(8월9일자 A5면 보도)가 눈에 띈다. 무슨 까닭일까? 민주당 소장파들의 정풍파동 때 김 대통령은 국정개혁 청사진을 밝히겠노라고 약속했으나 이어진 가뭄 홍수 피해 극복을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어 왔다. 정국에 관한 한 별로 하고 싶은 말이 없었던 때문일까. 그러나 최근 권좌를 거쳐간 전직 대통령들의 행로를 되새겨 보면 집권 말기에 접어든 김 대통령의 정치적 침묵도 예상된 수순이나 다름 없어 보인다.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서 아주 가까운 실례를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문민정부는 처음부터 국민에게 너무나 많은 것들을 약속했었다. 약속들 중에는 득표전략상 한껏 부풀려진 것들도 있었고, 인기에 영합한 것들도 적지 않았다. 요즈음 새삼스럽게 비판의 대상이 되는 포퓰리즘이 바로 문민정부 초기에도 난무했다. 서둘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함으로써 당장 선진국 문턱에 진입할 것처럼 정부가 먼저 샴페인을 터뜨렸던 것이다. 정권 중반기에 접어들면서 이런 장밋빛 약속들이 비현실적인 것으로 드러나면서 하나 둘 실종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라진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정권은 더 많은 말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정권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국민은 아예 등을 돌리기 시작했고, 끝내는 아무도 말을 믿지 않았다.

인기 폭락 속에서 경제회생 기치를 내걸고 등장한 ‘국민의 정부’도 처음부터 너무 많은 것을 약속했다. 100대 국정과제만 봐도 과욕적이라 할 만하다. 게다가 4대 부문 개혁, 교육개혁, 의약분업, 남북정상회담 등등 역사적으로 과중한 업무들을 무리하게 몰아붙였다. 개혁에 부수되는 고통들을 달래기 위해 정권은 더 많은 말을 해야 했다. 남미의 여러 나라가 10년이 넘도록 치유하지 못한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후유증을 우리는 단시일 내에 극복하고 있다고 자랑했다. 가나안 복지가 당장 눈앞에 다가오기라도 한 것인 양 단꿈을 부추겼다. 그러나 잡히지 않는 꿈에 실망한 국민은 이미 서서히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목자의 휘파람 소리가 그치고 양들의 침묵이 길어지는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민주사회가 시들고 있다는 조짐이다. 의사소통의 장애가 심각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개혁이란 이름으로 특정언론의 목에 시퍼런 칼날을 들이대는 현재의 상황이 침묵의 장기화를 예고하는 것 같다. 목민(牧民)의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상태가 지속되면 사회 내면의 공동체 의식이 파괴되고 사회적 통합은 걷잡을 수 없는 파도에 휩쓸리고 말 것이다. 그것은 제왕적 통치행태가 낳는 필연적인 결과일지도 모른다.

목자가 잠들었을 때 그를 흔들어 깨우는 휘파람 소리는 권력 밖에서 권력을 감시하는 지식인들의 몫이어야 한다. 정치사회 속에서 지식인들의 얼굴은 물론 가지가지이다. 현실의 정치권력 속에서 기대 이익을 누리는 사람들은 대체로 그 권력의 정당성보다 안정성과 지속성에 대한 맹목적 욕구를 갖기 쉽다. 그들은 휘파람을 불 이유를 알지 못한다. 내면적으로는 정당성을 거부하나 외면적으로는 안정성을 추구하는 일종의 이중모럴적 지식인도 권력의 궤도 이탈에 대해 경종을 울릴 용기를 갖지 못한다. 내면적으로 역겨울 뿐만 아니라 외면적으로도 승인할 수 없어 그것이 횡행하는 현실을 벗어나 망각의 세계로 도피를 시도하는 지식인 또한 짜릿한 휘파람 소리를 잃은 소시민과 차이를 두기 어렵다.

양들처럼 지식인은 역사 앞에 오래 침묵하고 앉아 있을 수 없다. 오히려 목자의 휘파람 소리가 잦아들 때면, 지식인은 마치 미네르바의 부엉이처럼 저녁놀이 물들기 시작할 무렵 이미 날기 시작해야 한다. 개인의 자유에 대한 희망과 인간에 대한 원초적인 신뢰가 그의 잠재의식 속에 꿈틀거리고 있다면 말이다.

김일수(고려대 교수·법학·본보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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