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일수/정의의 女神

  • 입력 2001년 7월 27일 18시 31분


디케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정의의 신이다. 제우스의 아내 테미스에겐 세 딸이 있었다. 순박하고 아름다운 디케와 복수의 여신 네미시스, 불의의 여신 아디키아였다. 디케는 정의를 상징하는 어떤 물건도 손에 들지 않았다. 다만 다소곳한 얼굴만이 정의의 여운을 느끼게 해 준다. 그녀의 두 볼엔 내면의 추악을 부끄러워하는 양심의 수줍음이 진홍빛처럼 녹아나는 것 같다. 디케에게는 아디키아를 압도할 힘도, 네미시스의 타오르는 복수심도 없다. 디케의 정의는 차라리 약자의 진실, 약자의 침묵이 토해내는 향기에 가깝다.

▷유스티티아는 로마신화 속에 부활한 디케다. 그래서 고대 로마의 유스티티아도 손에 든 것 없이 디케처럼 청초했다. 중세에 접어들면서 그녀는 손에 칼이나 저울을 든 모습으로 나타났다. 한 손엔 저울, 다른 한 손엔 칼이나 성서를 들기도 했다. 안대로 눈을 가린 유스티티아는 16세기 이후 상징물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두 눈을 가린 것은 정의가 갖는 불편부당, 공평무사를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유스티티아는 오늘날 우리의 법문화에서도 품격높은 정의의 상징으로 통한다. 서울 광화문 근처 옛 변호사회관 앞마당엔 저울과 칼을 든 그녀가 서 있다. 서초동 대법원건물 대법정 출입문 위에도 그녀가 전형적인 한국 여인의 모습으로 저울과 법전을 들고 앉아 있다. 법과 정의가 추구되어야 할 곳이라면 검찰청, 국세청, 국회의사당 어디에라도 그녀가 있으면 좋겠다.

▷다만 한국적 토착화를 기하려면 검찰청 앞 유스티티아는 저울과 칼 외에 반드시 안대로 눈을 가릴 일이다. 정치권의 눈치를 살피지 말라는 아주 오래된 염원을 담기 위해서다. 국세청에 세울 정의의 여신상은 디케의 모습 그대로면 좋겠다. 국세청이 외치는 ‘조세정의’가 막강 조세권을 휘두르는 강자의 언어가 아니라 세무조사에 떠는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언어라는 사실을 깨우치기 위함이다. 국회의사당 앞엔 어떤 자태의 여신상이 좋을까? 요즘 ‘가당찮은 놈’과 ‘곡학아세’론에서 다시 ‘야만적 지식인’론으로 막 나가는 추미애 의원을 끌어 올려 취기를 씻기고 예술가의 상상력에 맡겨보면 어떨까?김일수 객원 논설위원

김일수 객원 논설위원(고려대 교수·법학)

ilsukim@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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