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산의 캐릭터열전]'컨버세이션'의 해리 콜

  • 입력 2001년 7월 19일 18시 41분


지금은 기력이 많이 쇠잔해진 듯 싶지만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는 한때 세상을 뒤흔들었던 명감독이다.

코폴라 최고의 해는 1974년이었다. 그 해 그는 ‘대부2’로 아카데미상을 휩쓴 것만으로 모자라 전혀 색깔을 달리하는 또 다른 걸작 소품으로 칸영화제에서도 그랑프리를 움켜쥐었다.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가버렸지만 코폴라 전성기의 이 숨겨진 걸작 ‘컨버세이션’이 뒤늦게 국내에 비디오로 출시되었다는 소식이다.

▼코폴라 감독의 걸작▼

해리 콜(진 해크먼)은 최고의 명예와 대우를 받는 탁월한 도청전문가다. 그는 불가능을 모른다. 일단 그의 표적이 되면 누구라도 자신의 모든 것을 백일하에 노출당하게 된다.

영화의 오프닝은 고도의 기술로 감행되는 도청장면이다. 점심시간을 맞은 도심 한복판의 광장, 허튼 수작을 거는 피에로와 노상연주를 벌이는 재즈악단, 그리고 행인들 사이로 한 쌍의 커플이 일견 무의미한 듯 들리는 잡담들을 나누며 걷는다.

누구라도 자신이 도청당하고 있다는 의심을 품을 수 없는 공간이다. 그러나 해리는 그들의 낮은 한숨과 실없는 웃음 그리고 가볍게 입맞출 때 들리는 부드러운 타액의 느낌까지도 낱낱이 잡아내고야 만다.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것은 해리 콜이라는 캐릭터다. 그는 애인의 집을 찾아갈 때도 문 밖에서 30분 이상 동태를 살핀다. 그 다음, 열쇠를 아주 느린 속도로 돌리다가 급작스럽게 문을 밀치고 들어간다. 누군가에 의해 감시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 때문이다.

애인이 근황을 물어오면 그는 질문의 저의를 의심한다. “그저 당신에 대하여 좀 더 알고 싶을 뿐”이라며 애인이 흐느낄 때도 그는 욕실문이나 장롱문을 열어젖히며 그 안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는 도청장치를 찾는다. 이런 남자를 도대체 어떤 여자가 사랑할 수 있을까? 요컨대 그는 마치 화석화한 삼엽충처럼 자기만의 세계에 굳게 웅크리고 들어앉아 그 누구와도 의사소통을 하려들지 않는 것이다.

이 영화의 제목 ‘컨버세이션’이 뜻하는 바는 의미심장하다. 컨버세이션(대화)은 곧 커뮤니케이션(의사소통)이다. 그런데 남들의 내밀한 대화를 엿듣는 전문가는 오히려 그 누구와의 의사소통도 불가능한 폐쇄공간 속에서 외롭게 살아간다.

이 남자의 유일한 오락이란 겹겹이 자물쇠를 채워놓은 자신의 아파트 안에 웅크리고 앉아 LP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반주 삼아 홀로 색소폰을 부는 것뿐이다. 그 고독과 단절의 이미지가 너무도 섬뜩하다.

▼세상과 대화를 거부▼

히치콕도 울고 가게 만들만한 대반전을 거친 다음 우울하게 지속되는 라스트신은 잊을 수 없다. 그 자신도 도청당하고 있음을 깨달은 해리가 편집광적 태도로 자신의 아파트를 완전히 해체하는 장면이다.

전화를 뜯어 모든 부품들을 검사하고, 아끼던 애장품 성모마리아상을 깨뜨리고, 마루바닥을 하나하나 뜯어내고…. 끝내 해리는 완전히 폐허가 되어 뼈대만 남은 아파트에 홀로 앉아 색소폰을 분다.

최고의 프로페셔널? 무턱대고 부러워할만한 것도 못된다. 그 전문성이라는 것에 매몰되어 자신 속에 갇혀버리고야 만다면.

심 산 <시나리오작가> besmart@netsg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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