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포커스]양평 국악음반박물관 노재명 관장

  • 입력 2001년 7월 12일 18시 42분


겉으로 보면 록그룹이나 인디밴드를 이끄는 사람같다. 길게 길러 묶은 머리에 수염까지. 7일 경기 양평에 국내 최초의 국악음반박물관을 세운 노재명(盧載明·32)씨. 고교 2학년 때부터 16년 간 수집한 국악음반, 직접 만나 채록한 명인 명창들의 육성과 공연실황, 사진 등 3만5000여점의 방대한 자료를 한곳에 모은 박물관이다. “국악을 직업으로 삼지 않으려고 애 많이 썼어요. 굶어 죽을까봐 비겁하게 국악과도 가지 않았죠. 그러다 보니까 나도 주변에서도 직업인지, 취미로 즐기는 건지 헷갈려하더라구요. 내가 선택한 길이니 여기에 맞는 ‘인테리어’를 해주기로 작정했어요.” 박물관 짓느라 건강을 해쳐 간간이 밭은 기침을 하는 그의 설명을 듣고보니 외모가 달리 보였다. 자칭 국악환자인 노관장을 이 바닥에선 재야 국악연구가, 전통음악의 고고학자로 부르고 있다.

#1. 쑥대머리 귀신 형용, 적막 옥방 찬 자리에 생각느니 임뿐이로다. 보고지고 보고지고 한양낭군 보고지고…(춘향가 중 쑥대머리)

노관장을 만나기 전 가장 궁금했던 것은 어떻게 고교 때부터 국악 자료수집을 시작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었다. 고교생이 국악에 미친다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다. 집안에 국악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부잣집 아들도 아니었다. 중학교 때부터 그 또래 아이들이 그러하듯 팝송과 록 헤비메탈을 즐겼다. 일주일에 한두번씩 청계천가서 복사판 레코드사는 게 취미였다.

그런데 어느날 문득 우리나라에도 분명 전통음악이라는 것이 있을텐데 음악을 좋아한다는 내가 왜 못들어봤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있어야 눈에 보이는 법. 헤비메탈 레코드 옆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외면당하던 국악음반이 비로소 눈에 띄었다. 가난과 괄시만 물려받은 자손들이 아무렇게나 버렸던, 그래서 넝마주이들이 쓰레기줍듯 주워 고물상에 팔았던 망자의 유품들이었다.

“한달 전에도 있고 지난 주에도 있었는데 아무도 안사는거죠. 헤비메탈 레코드가 600원인데 그건 100원, 200원이래요. 호기심도 나고 싼맛에 국악음반 30장을 사들고 왔어요. 그 중 하나가 임방울의 쑥대머리예요. 번개를 맞은 것 같은 충격이었어요.”

노관장을 키워준 바탕으로 배재고교의 자유로운 학풍을 빼놓을 수 없다. 부부교사였던 부모님도 마찬가지지만 학교에서도 공부만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10대의 나이 때는 공부말고도 꼭 해봐야할 일들이 있다”고 선생님들은 들려주곤 했다.

그가 졸업한 서울 배재고교는 공부만 강요하는 학교가 아니었다. 오후3시 수업이 끝나면 서울시내 음반점을 샅샅이 뒤졌다. “국악레코드 있느냐”고 물으면 “국악이 뭐냐”고 되묻는 집도 있고, “임방울 있어요?”하면 은방울자매의 뽕짝을 들고나오는 곳도 있었다. 집에선 인이 박힐 정도로 임방울을 들었다. 서서히 귀가 트이는 것 같았다.

#2. 이 때 마참 어느 때, 녹음방초 좋은 때, 여러 제조가 날아든다. 여러 새들이 날아든다. 남풍조차 떨쳐 구만장천 대붕이, 문왕이 나겨시사 기산조양에 봉황새…(잡가 새타령)

환장(換腸)한다는 말은 거의 욕설로 쓰인다. 그러나 ‘마음이 전보다 아주 달라진다’는 것을 표현하는데 이보다 나은 말은 없다. 고3 때 조선말 5명창 중의 하나였던 이동백의 새타령을 만나고나서 그는 그만 환장을 해버렸다.

이동백이 어떤 사람이던가. 조선조 500년 역사상, 그리고 판소리 150년 역사상 소릿광대가 정3품 벼슬에 오른 이는 이동백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닌가. 원각사에서 소리를 할 때는 직접 납시지 못한 순종임금이 전화통을 귀에 대고 들었던 명창이었다.

“내 모든 걸 걸어서 이동백에 매달려도 좋다 싶었어요. 3만5000여 자료를 모은 것이 이동백 한사람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예요. 이 사람만 제대로 그려낼 수 있다면 평생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것처럼.”

꿈도 숱하게 꾸었다. 명창들과 같은 시대에 태어나지 못한 것을 한탄하다 잠들면, 꿈속에서 그는 이동백이 소리를 하는 현장에 녹음기를 들고 앉아있었다. “얼마나 좋으냐면요. 이동백의 적벽가를 들으면 단 한사람이 소리를 하는데도 대한극장 대형스크린에서 수백억 들여만든 시네마스코프 영화를 보는 것처럼 웅장한 영상이 눈에 보이는 거예요.”

‘황개 화선 이십척 거화포 신기전과, 때때때 나팔소리, 두리둥둥 뇌고 치며, 좌우 각선부대가 동남풍에 불을 모아 불을 들고 달려들어, 조조 백만대병 군병에다 한번을 불이 버썩, 천지가 떠그르르 강산이 무너지고…’ (적벽가 중 적벽강 불지르는 대목)

“이동백 음반이 나왔다”는 고물상의 연락을 받고 광분해서 한달음에 달려간 적이 있었다. 밤새 듣고 또 듣다가 껴안고 잠들었는데, 아침에 보니 그만 깨져있지 뭔가.

당연히 대학엔 떨어졌다. 재수 끝에 전문대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학생들 틈에 앉아있는 것이 우주인들 속에 있는 것 같았다.

간신히 졸업장을 받은 뒤 서울음반에서 음반기획의 일을 배우고는 1년 후 명인기획이라는 국내 첫 국악전문기획사를 차렸다. ‘국악에 관한 한 더이상의 명반은 나올 수 없다’는 자부심으로 그가 기획해서 만든 음반이 210종이다.

#3. 아서라 모두 다 취담일다, 유유한 세상사를 덧없다 한을 말고, 이윽히 눈을 들어 우주를 살펴보라…덧없다 볼작시면 천지가 일순이요, 변함없다 생각하면 만물이 무궁이라. (적벽부)

음반을 모으는 것과 명인 명창을 만나러 다니는 것은 또다른 차원이다. 대학 때부터 그들이 소장하고 있는 귀한 음반을 사기 위해 찾아다녔다.

나중엔 연로한 국악인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육성을 채록해야한다는 사명감이 생겼다. 사라져가는 위대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 이었다. 그렇게 해서 만난 국악인들이 500여명, 횟수로 따지면 1000번이 넘는다.

명창 김소희가 세상을 떠나기 1년전, 그의 스승 송만갑에 대한 증언을 들으러 갔다. 좀처럼 마음을 열지않으려 들지만 노관장에겐 비장의 무기가 있다. 제자도 갖고 있지 못한 스승의 음반 복사테이프와 사진들. 스승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 젊은 청년에 대한 대견함에 명창은 밤새우며 지난날을 풀어놓았다. ‘계면조 애원성으로만 이루어진 판소리’같았다.

지난해 6월엔 팔순이 넘도록 음반 한 장 없던 은율 삼현육각 인간문화재 김영택옹에게 음반을 제작해주었다. 김옹은 황해도 출신의 피리악사로는 마지막 생존자였다.

대동강물을 마시고 찬바람을 맞아야만 뽑을 수 있었던 시원한 냉면맛같은 피리소리를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놔둘 수는 없었다. 뼈만 남은 앙상한 손으로 음반을 받아들었던 김옹은 그로부터 여드레후 세상을 떠났다.

“고인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자신이 지니고 있던 것 한가지라도 더 나누어주려는 마음으로 제게 많은걸 들려주셨어요. 대대로 국악을 하던 집에 태어나 남의 회갑집 잔치에서 괄시받으며 피리를 불었던 것이며… 나도 그렇게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국악음반박물관도 그렇게 태어났다. 국악을 알고는 싶은데 도무지 알 길이 없어 답답했던 지난날을 다음 세대는 되풀이하지 않도록 해주고 싶었다. 음반이 있는 것을 알고 찾아갔는데도 복사는커녕, 들려주지도 않던 이들에게 진정한 기쁨은 나누는데 있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했다.

부모님이 노후를 보내기 위해 마련해두었던 양평 땅에 박물관을 짓겠다고 처음 벽돌을 놓은 것이 94년. 이건 개인이 할 일이 아니라는 후회 속에서도, 그동안 쌓았던 벽돌이 아까워 허물지도 못하고 7년에 걸쳐 건물을 지어올렸다. 딸아이가 그린 밑그림을 바탕으로 한국화가인 어머니는 타일을 구워 건물벽에 붙였다. 노관장의 고통과 집념이 배인 박물관은 동화속 집처럼 아름답다.

#4. 만좌 맹인이 눈을 뜬다. 전라도 순창 담양 새갈모 떼는 소리라, 짝 짝 짝 허드니 모두 눈을 떠버리는 구나…가다 뜨고 오다 뜨고 서서 뜨고 앉어 뜨고…(심청가 중 심봉사 눈뜨는 대목)

명창 성우향은 “어떤 매력에 이끌려 판소리에 몰두했느냐”는 노관장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다. “늘 좋은 목이 나오면 아마 재미가 없을 것이다. 목이 풀렸다 잠겼다 하면서 좌절하기도 하고 신명이 나기도 하는데 그런 과정에서 기쁨을 찾는다. 몸이 붓고 말을 전혀 못할 정도로 수련을 하면 고통스럽지만, 좌절을 이겨내고 갈망했던 소리를 얻으면 그것처럼 기쁜 일이 없다.”

득음(得音). 명창만 이를 수 있는 경지는 아니다. 국악을 즐기는 귀명창은 물론, 자신의 일에 독공(獨工)을 다한 사람이면 누구나, 어느날 심봉사 번쩍 눈뜨듯 자기 분야에서 득음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 득음은 어떤 것이냐고 물었다.

“문화라는 것은 수익성이 있든 없든, 활용성이 있든 없든, 한그루의 나무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요. 한번 심어지면 누가 뽑아내거나 벼락이 쳐서 뿌리가 뽑히기 전에는 늘 그 자리에 서있죠. 사람들이 많이 오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와서 그늘에서 쉬기도 하고, 나무 아래서 데이트도 하고, 뭔가를 느끼기도 하고…세월이 흐른 뒤에도 그 나무가 그대로 서있으면 위안을 얻지 않을까요.”

젊은 박물관장은 평생 그런 나무를 지키는 박물관지기가 되겠다고 했다. 그 나무 그늘에서 느리면 느린대로 깊고 여유로운 삶의 호흡을 느끼고, 빠르면 빠른대로 끊어지지 않는 국악의 신묘함에 빠져드는 건 이제 우리의 몫이다.

<만난사람=김순덕차장 yuri@donga.com>

▼여름에 들을만한 국악 5選▼

노재명관장은 “음악은 언어와 마찬가지”라고 했다. 외국어공부를 시작할 때 가장 먼저하는 일은 히어링 연습이다. 소리가 들릴 때까지 듣고 또 듣다보면 입으로 말할 수 있게 되고 자유롭게 토론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국악도 기분좋을 때, 심란할 때, 사계절을 겪으면서 자꾸 들으면 외국어를 알아듣듯 맛을 깨닫게 된다. 다음은 노관장이 추천하는 이 여름에 들을만한 국악 베스트 5.

▽이동백 새타령〓20세기 최고 명창 이동백의 장기. 마치 온갖 새들이 옆에서 지저귀는 듯하다. 특히 뻐꾸기 묘사가 압권.

▽신쾌동 거문고산조〓국악기 중 최고로 꼽히는 거문고. 산조의 달인 신쾌동. 그 외 어떤 조건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전추산 단소 정악〓단소의 전설적인 명인 전추산. 신비한 그의 단소음색은 황홀함 그 자체다. 소름이 끼칠 정도.

▽이병성 가곡〓한국성악의 진수. 가곡의 거성 이병성, 우리의 장구한 문화유산이 그의 성음에 녹아있다.

▽박송암 범패〓우리의 3대 성악 중 하나로 꼽히는 범패. 그 유서깊은 소리를 21세기까지 전해준 거장 박송암. 엄청난 경지.

●시중 평범한 음반점에서는 찾기 힘들 수 있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 국립국악원 음반매장(02-580-3160)에서 구할 수 있다. 노관장의 음반박물관에서도 물론 들을 수 있다.

▼박물관 찾아가는 길▼


△주소〓경기 양평군 서종면 수입리 031-772-9838, 02-417-7775(서울사무소) http://hearkorea.com

△관람〓토일 오전10시∼오후8시 어른 3000원, 초중고생 2000원

△찾아가는 길〓서울 청량리광장 앞에서 문호리행 8번, 양수리행 166-2번 버스타고 종점에서 내려 수입리행 버스 승차, 수입리 초등학교 앞에서 하차. 청량리역에서 양평행 기차 또는 강변역에서 양평행 버스를 타도 된다. 승용차는 강원 홍천행 6번국도→팔당터널 4개, 봉안터널 1개 지나자마자 서종면 양수리 방향 우회전→진중삼거리에서 우회전→양수대교 지나 서종면 쪽으로 좌회전→수입초등학교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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