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충식]박정희 소장 동상 앞에서

  • 입력 2001년 5월 11일 18시 21분


박정희 소장.

육군 소장 군복 차림의 흉상(胸像) 앞에 서서 당신이 일군 삶의 기구한 업(業)을 생각합니다. 봄꽃 피고 새들이 우짖는 이 한가한 서울 영등포의 문래공원, 그 한 모퉁이 당신의 동상 주변만은 퍽 어색한 분위기입니다. 뛰어들지 못하게 쳐놓은 높은 철책, 그 안에 이중으로 설치된 전자 감응 보안시설. 육신은 이승을 떠난 지 이십년을 넘겼지만 여전히 삼엄한 ‘경호’입니다.

그러니까 40년 전 5월16일 아침, 서울 시청앞에서 박종규 차지철의 살벌한 경호속에 권력무대에 데뷔하던 그 날을 떠올리게 됩니다. 당신이 세상을 떠난 지 22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당신의 삶은 아직도 경호를 받는 현재 진행형입니다. 동상의 코 부분은 유독 새파란 페인트 칠입니다. 얼마 전 계란으로 얻어맞은 자리여서 씻어내고 새 칠을 한 것 같습니다. 필시 동상을 철거하라는 사람 등쌀 때문일 것입니다.

▼아직도 '경호' 받고 있군요▼

나는 이제 동상 철거에 감연히 반대합니다. 무엇보다도 총칼로 권력을 잡고, 총 맞아 세상을 떠난 권력자의 성공과 비애를 이처럼 생생히 보일 수는 없을 테니까요. 이런 기막힌 ‘사후(死後) 경호’의 아이러니를 보이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총칼로 헌정 질서를 부수고 싶은 욕망, 인권을 희생하면서라도 권력의 능률을 좇으려는 유혹, 그런데 빠지지 않게 깨우침을 줄 것입니다.

대통령으로 일하면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고 말하곤 했지요. ‘정치 압살이다, 인권탄압이다 떠들어도 내 길을 가겠다. 경제를 일으키기 위해 일하다 죽겠다’는 자부와 다짐의 다른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사사건건 반대를 일삼는 김영삼 김대중같은 야당 리더들을 참으로 미워했지요. 그것은 저주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당신의 걱정 증오와는 반대로 흘러갔고 둘 다 대통령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분해하고 억울해 할 것만은 아닙니다. 역설적이게도 그 둘이 대통령이 됨으로써 당신이 이끌던 시대는 더욱 추억거리가 되었으니까요. ‘김영삼이가 대통령 되면 나라 망한다’고 당신이 저주했던대로 김영삼은 이제 성공한 대통령으로 기억되지 않습니다.

당신은 김대중의 언변을 얄미워하고 거기 감복하는 국민을 경멸했습니다. 실적 대신 웅변으로 흔들어 대는 야당과 김대중, 그쪽에 표를 찍는 국민이 거의 반수에 달한다는 사실을 끔찍하게 생각했습니다. 10월유신도 그래서 저지른 일이라지요. 그러나 김대중 역시 대통령이 되어 반대와 성토로 쌓아올린 업(業)에 갇히기라도 한 듯 야당의 공세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60, 70년대 야당이 떠들던 외채 공세 같은 것을 기억합니까. 선거 때만 되면 되풀이하던 기막힌 비아냥, ‘외채로 망국(亡國)이 온다. 한국의 갓난아이는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는 순간 빚이 200만원! 하고 운다’던 소리 말입니다. 청와대에서 분통깨나 터뜨렸겠지요.

당신의 분노를 21세기의 김대중 대통령이 되풀이합니다. ‘한나라당이 나라 빚을 1000조원이라고 주장한다. 그 기준이 OECD나 IMF기준과는 맞지 않다. 또 국가 재정을 통해 경제를 살려야 국민이 먹고 살 게 아닌가. 빚을 줄이려면 간단하다. 일 않고 가만히 있으면 된다. 실업자도 내버려두고 은행도 망하게 버려 두고.’(5월6일 청와대 대변인)

▼당신의 운명은 역사의 산 교훈▼

당신의 시대에 불붙은 지역 감정이 이 나라를 고통의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오직 이겨야 한다는 목표로 지역 대결의 불씨를 묻음으로써 30년이 지나도록 국민은 그 업보의 악순환에 치를 떨고 있습니다. 그 업(業)은 어느 세월에 끝을 보게 될까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 저런 이유 때문에라도 동상을 철거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정치 선전 구호의 허와 실, 정치 행태의 참과 위선, 아무리 급하고 궁해도 건드리지 말아야 할 재앙거리, 그런 것들을 곰곰 되씹게 하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여기 동상으로 서 있을 가치가 있는 게 아닐까요.

그리하여 연년세세 정치의 질이 바뀌고 정치인이 달라지는데 상상력을 부여하고 교훈을 주게 된다면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동상을 둘러싼 철책도, 전자 감응 장치도 사라지고 당신도 한적한 공원의 일부로 남게 되겠지요. 당신이 근무하던 6관구사령부가 지금 푸른 잎 무성한 이 공원이 되었듯이, 당신의 모진 운명도 역사를 풍성하게 하는 것일지 누가 압니까.

김충식<논설위원>seesche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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