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 이래서 명작]마르셀 프루스트 '스완의 사랑'

  • 입력 2001년 4월 3일 10시 19분


"스완은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자신을 예술가로 여기던 젊은시절처럼 모든 것에서 매력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옛날 같은 것은 아니었다. 경박한 생활로 흩어졌던 젊은시절의 영감이 몸 안에 다시 태어나는 것을 느꼈다."

◇ 삶과 예술의 조화를 꿈꾼 영혼

어느날 프루스트는 절친한 친구 레날도와 함께 정원을 산책하며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나란히 걷던 두 사람이 활짝 핀 장미나무 옆을 지나칠 무렵, 갑자기 프루스트는 멈춰서더니 하던 말을 중단하고 뭔가 마음에 걸린 듯 머뭇거렸다. 그러나 친구 역시 멈춰선 것을 의식하고는 이내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채 몇 걸음도 걷지 못하고 다시 멈춰서더니 이내 어린아이처럼 약간 슬픔이 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먼저 앞에 가겠나? 곧 뒤따라가도록 하겠네. 조금 전 그 장미가 보고 싶어서......"

레날도는 프루스트를 혼자 내버려둔 채 먼저 앞으로 걸어갔다. 그가 사잇길을 돌면서 뒤돌아보니 프루스트는 장미나무 쪽으로 되짚어가고 있었다. 그가 집을 한바퀴 돌아 나왔을 즈음엔 장미 곁에 서서 꽃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는 숙이고 진지한 표정으로, 눈썹까지 지그시 찌푸리고서......

이윽고, 한참이 지나서야 프루스트는 레날도를 부르며 뛰어왔다. 그리고는 가까이 다가와 이렇게 물었다.

"화나지 않았나?" 레날도는 아니라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고, 두 사람은 그 사이 중단했던 대화를 다시 이었다. 하지만 레날도는 그 장미나무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 일이 있기 전에도 그는 여러 번 그와 비슷한 장면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레날도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런 마르셀의 모습은 참으로 신비스러웠다. 그가 장미꽃을 바라보던 모습은 자연, 예술, 인생이 완전히 하나가 되는 모습이었고, 통찰력과 열정이 교차되어 그의 전 존재가 물아일체의 경지에 잠겨 있는 듯 심오하기 그지없었다."

마르셀 프루스트, 그는 누구에게나, 어떤 것에나 깊은 애정과 세심한 관심을 지닌 따스한 영혼이었다.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긴 덕목은 친절.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두루 친절해야 한다고 믿었고, 작고 하찮은 사물들과도 깊고 친밀한 교감을 나눌 줄 알았다.

◇ 풍부한 감수성과 예민한 감각

1871년 파리 태생. 프루스트의 아버지 아드리앙 프루스트는 저명한 의사였고, 어머니 잔느 베이유는 교양있고 부유한 유대인이었다. 프루스트는 유복하고 단란한 환경 덕분에 일찍이 화려한 사교계 생활을 맛보며 적어도 물질적으로는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9세에 첫 발작을 시작으로 갑작스럽게 발병한 천식 때문에 어머니의 도움 없이는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불행한 소년이기도 했다.

타고난 민감한 감수성과 늘 그에게 책을 읽어주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프루스트는 일찍이 독서를 즐겨하며 문학적 소양을 키웠다. 콩도르세 고등학교 때에는《향연》이라는 문학 동인지를 친구들과 함께 창간하게 되면서 문학적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아버지는 아들이 회계검사원이 되기를 바랐지만 프루스트는 사교계에 진출해 문학적 재능을 한층 키우고 싶었다. 당시 사교계의 화려한 생활도 선망의 대상이긴 했지만, 작가수업으로써 그곳에 모인 다양한 인간군상과 그들이 벌이는 온갖 진기한 일들을 몸소 관찰하고 경험해 보고 싶었다. 준수한 외모에 섬세하고 누구에게나 다정다감했던 프루스트는 이내 사교계의 총아로서 인기를 얻었고, 이런 그를 두고 문단에서는 문학을 교양으로 즐기는 속물이라 폄하하기도 했다.

그러나 프루스트는 남들이라면 쉽게 지나칠 수도 있는 작은 사물이나 사소한 일들을 세심히 관찰하고 깊이 생각하는 탁월한 지성을 지니고 있었다. 더욱이, 생철학자인 베르그송과의 만남으로 그는 명민한 의식을 지닌 자유로운 흐름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타고난 감수성이 더해져 사물이나 인간내면을 관찰하여 기술하는, 그때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개념의 소설을 세상에 내놓는다.

프루스트는 비평가로 문단에 입문해 활동하다 소설가가 된 드문 예에 속하는 작가다. 그의 비평적 성찰은 작가가 된 이후에도 계속돼, 자신의 작품을 통해 삶과 예술의 진정한 관계를 조망하고자 했다. 영국 작가 존 러스킨의 저서《아미맹의 성서》《참깨와 백합》을 번역 출간하기도 했던 프루스트는 그의 영향을 받아, '예술을 진정한 유일한 현실'이라 받아들이게 된다.

◇ 인간 내면의 탐구자

프루스트는 30대 초반에 부모를 연달아 여의고 인생의 전환기를 맞는다. 특히 어머니의 사망은 심한 충격을 주어 한동안 문학활동을 중단하기도 했고, 심한 자책감과 상실감으로 괴로움을 겪었다. 어린시절부터 병약한 그를 헌신적으로 돌보았고,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던 어머니의 죽음은 자신의 죽음보다 더한 고통으로 받아들여졌다. 이후 그의 삶은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사라진 자신의 행복한 기억들을 찾는 데 바쳐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루스트는 38세 때부터 외부세계와 단절에 들어갔다. 미세한 먼지와 꽃가루에도 천식발작을 일으켰고 바깥의 작은 소음도 견디지 못하는 민감한 신경을 지닌 탓에, 그는 이중창문과 사방에 코르크를 두른 방에서 나머지 여생을 보내며 작품 집필에만 몰두한다. 그는 밤에만 밖으로 나왔는데, 이는 창작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자료수집을 위해 리스의 올리비에 호텔에 들러 낮 동안 손님들이 나눈 대화내용을 종업원이나 지배인에게 물어보곤 했다. 그리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엎드린 자세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초고를 썼는데, 총 2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양에 끊임없는 수정과 첨삭작업으로 원고는 다 헤진 조각천 같았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중 제1편《스완네 집 쪽으로》가 출간된 당시만 해도 그의 소설이 지닌 진가를 제대로 알아보는 사람들은 적었다. 작품에 대한 평가는 가혹해서, 불분명하고 복잡한 문체에다 특별한 주제나 내용도 없다는 혹평을 받았다. 당시 출간을 거절한 이들 중 하나였던 앙드레 지드(자신의 일기에서 프루스트에 대한 동성애적 사랑을 표현하기도 했는데)는 후에 프루스트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한 당시의 일을 두고 자신의 일생일대의 실수라 토로한 바 있다. 어쨌든 이후 독창성을 인정받으면서 프루스트는 '20세기 소설의 혁명을 이끈 작가'로, 당시 주조를 이루던 사실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 중심의 리얼리즘 소설들과는 전혀 판이한, 이른바 '의식의 흐름'에 따라 인간의 내면세계를 보여주는 '신(新)심리주의 소설'의 대가로 평가받는다.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예술과 삶의 조화

프루스트가 1910년부터 51세로 사망하기 전까지 병약한 몸을 이끌고 13년 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 완성한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누군가의 표현을 빌자면, "한 시대의 역사이자 동시에 한 의식의 역사"다. 우리는 스완의 사랑이야기를 통해 19세기말 새로운 지도계층으로 부각하기 시작한 부르주아의 면모와 당시의 시대상을 속속들이 알 수 있다. 스완을 비롯한 베르뒤랭가의 사람들을 통해, 부와 명예를 손에 넣었지만 그것을 뒷받침할 교양과 지적 능력이 모자란 당시 일부 부르주아들의 허풍과 위선, 속물근성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프루스트에게 '잃어버린 시간'은 자신의 행복한 유년시절이자, 존재의 바탕을 형성하던 근원적 세계다. 프루스트는 '무의식적 기억을 통한 회상'이라는 방법을 통해 과거의 행복했던 시절들을 현실의 시간 속에 회귀시키고자 한다. 작품 속에서 우리는 사건 전개의 필수요건이라 생각해온 인물들간의 대화를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스완의 사랑》에서도 스완의 사랑은 오데트와는 직접적인 관련없이 순전히 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심리변화를 통해서 생성되고 변화하는데, 현실에서 덧없이 끝난 그의 사랑은 뱅퇴이유의 음악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다. 우리는 이를 통해 시간의 흐름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영원의 세계는 오직 인간의 내면에만 존재하며, 예술적 창작을 통해서 구현 가능하다고 본 프루스트의 예술관을 접할 수 있다.

◇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스완은 서른이 넘도록 사교계를 드나들며 여러 여자들을 만나 즐기고 뚜렷하게 하는 일 없이 무위도식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러던 어느날 그에게 한 친구가 오데트라는 여인을 소개해준다. 얼핏 보기에 그녀는 별 매력도 없는 외모에, 풍기는 인상 또한 사랑의 감정을 가시게 할 것 같은 그런 여자였다.

그런데 오데트와 베르뒤랭가의 사교 모임에 참석한 후 함께 돌아오던 날, 그녀가 보여준 다정함과 애정어린 표현에 매료되면서 스완은 서서히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다. 전혀 뜻하지 않게 찾아온 사랑, 과연 오데트와의 사랑은 스완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지......

The more

◇ 글쓴이 연숙진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불어과를 졸업하고,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번역서로는 《너에게 소나기를 가져다줄게》와 《알퐁스 도데 단편집》(공동번역)외 다수가 있다.

<북코스모스 가이드북 필자 E-mail:nervalien@hanmai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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