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ce&focus]김송자씨 첫 여성차관 임명

  • 입력 2001년 4월 1일 19시 04분


“여성 ‘투사’라는 강한 모습으로 알려져 부담스럽네요.”

사상 첫 중앙부처 여성 차관으로 1일 임명된 김송자(金松子·61·사진)노동부차관은 “이제 여성문제 이외에 취업난 해결과 신노사문화 정착에 일조하고 싶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음주 흡연은 물론 걸걸한 입담까지도 남자 못지않은 김차관은 30년 공직생활 내내 ‘성차별’에 얽힌 숱한 일화를 남겼다.

69년 총무처에서 주사(6급)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으나 그의 책상은 7급 남성 직원 뒤에 놓여 있었다. 그는 “여성 근로자 차별을 없애는 것이 내 사명”이라고 생각해 당시 총무처보다 한직으로 평가되던 노동청(노동부의 전신)으로 자진해서 옮겼다.

그는 노동부 재직 중 승진에서 떨어지자 회식자리에서 “회전의자 임자가 따로 있나…”라는 노래를 불러제쳤고 아무도 안 나서는 응원단장을 선뜻 맡는 등 남다른 ‘오기’가 있었다. 이 때문인지 ‘노동부의 대모’ 등으로 불렸다.

김차관이 자랑하는 업적은 87년 부녀지도관 시절 남녀고용평등법을 입안한 것. ‘남자만 채용’한다는 광고가 위법이 된다는 사실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경제부처가 비용 문제로 ‘여성보호’를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여성도 직장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지론을 억척같이 관철시켰다.

물불 안 가리는 추진력으로 인해 쓰라린 ‘좌천’의 경험도 있다. 90년 청와대 주도로 탁아문제를 노동부에서 보건사회부로 이관하려 할 때 주무국장이던 김차관은 “근로 여성의 문제인 탁아를 아동복지 문제로 넘기면 기업들에 근로여성의 보호를 강제할 수 있는 힘을 잃게 된다”며 반대했다.

다급한 김차관은 당시 대통령 부인이던 김옥숙(金玉淑)여사가 여성계 인사들과 함께한 오찬 자리에서 주위의 만류를 물리치고 김여사에게 다가가 새 보육법의 부당성을 역설했다. 그때 김차관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김여사의 치맛자락을 밟고 있었다. 이후 그는 국방대학원에 여성 최초로 교육 파견되면서 여성정책 일선에서 물러나야 했다.

김차관은 최근 발간된 수필집에 “청와대가 추진하는 법을 안된다고 달려들었으니 나를 그냥 뒀겠느냐”며 “청와대에서는 아예 내 옷을 벗기려 했지만 장관 지혜로 피해 있었다”고 썼다.

김차관의 남편은 명지대 교수인 유경득(柳京得·61·무역학)씨. 동향(경북 칠곡) 출신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고교 때 처음 만났다. 그는 고려대 법대에 입학한 뒤 재수생이던 유씨에게 편지공세를 펴 결국 사로잡았다. 이들 부부는 본적을 ‘7월 2일 풀밭에서 청혼’했다는 의미로 ‘서울시 중구 초(草)동 72번지’로 하고 있다.

여성계는 김차관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 한국여성민우회 정강자(鄭康子)대표는 “김차관은 적극적이면서도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이라며 “김차관이 구조조정 과정에서 불이익을 받는 여성 근로자에게 관심을 가져줄 걸로 믿는다”고 말했다.

<김준석기자>kjs35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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