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기업 신용평가' 정부 입김에 '흔들'

  • 입력 2001년 2월 28일 18시 52분


《신용평가는 과거 실적을 토대로 기업의 미래를 예상하는 객관적 지표다. 투명경영을 위해 엄정한 회계감시가 필요하듯, 올바르고 냉정한 투자를 위해서는 신뢰할 수 있는 신용평가 시스템 정착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금융감독위가 현대그룹 계열사의 신용평가과정에 개입하고, 단수평가제 실시 방침을 밝히는 등 정부정책이 ‘시스템을 무너뜨리는 쪽으로 가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사실 금감위를 제외하고는 온통 우려하는 목소리뿐이다. 한마디로 ‘금융개혁에 역행하고 있다’는 것. 정부의 신용평가 관련 정책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전문가들에게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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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평가회사에서 기업 채권신용평가를 담당하고 있는 연구원 모씨는 요즘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담당한 현대건설의 신용을 평가하기 위해 방대한 분량의 서류를 밤새 뒤져 내린 신용등급에 대해 정부가 제동을 걸고 나섰기 때문이다. 정부가 기업의 신용등급에 대해 논하는 것도 해괴하기 짝이 없었지만 당국의 입김이 회사 내부 분위기나 평가결과에 실제로 영향을 주고 있다는 현실에 자괴감까지 생겼다.

“그럴 바엔 정부가 직접 기업 신용평가를 하지 뭣하러 민간기업에 맡기느냐”며 동료들도 공분했지만 그렇다고 달리 해결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신용평가라는 건 기업의 현금 흐름과 손익계산을 통해 리스크를 산정하고 투자자의 판단에 도움을 주려고 등급이라는 결과물을 제시하는 일”이라면서 “정부가 이래라 저래라 하면 어떻게 소신껏 등급을 매길 수 있겠느냐”며 울분을 토했다.

‘시장의 파수꾼’ 역할을 해야 할 신용평가 시스템이 외풍(外風)에 흔들리고 있다. 정부의 개입이 도를 넘어선 것이다.

학계와 금융계는 “최근 분식회계를 일소하려는 움직임 덕분에 회계감사는 투명화의 길로 가고 있는데 신용평가는 정부의 임기응변적 단견으로 추락할 위기를 맞고 있다”고 우려했다. 정부의 입김이 시장원리를 훼손하는 현실이 계속된다면 신용평가뿐만 아니라 금융개혁 전반이 공염불에 그칠 것이라고 이들은 경고하고 있다.

▽“현대그룹 신용등급은 정부가 결정한다”〓정부의 신용평가 간섭은 현대건설과 현대전자의 부실채권 인수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금융당국은 “자금시장 안정대책 이후 이들 기업의 자금 흐름이 좋아졌는데도 신용평가기관들이 신용등급을 낮게 평가하는 바람에 회사채나 기업어음(CP) 등이 유통되지 않는다”고 주장해 왔다.

한국신용평가가 현대전자의 회사채를 투기등급인 BB+로 하향 조정했을 때는 한국기업평가와 한국신용정보의 담당 직원들이 금융감독원에 불려가 ‘꾸중’과 ‘설교’를 들어야 했다. 당시 현대전자는 목표한 신디케이트론 조달에 실패해 단기채무리스크가 크게 높아진 시점이었다.

한 신용평가사 임원은 “평가기관 직원을 불러서 압력을 넣는 정부가 세상에 어디 있느냐”며 “이게 금융개혁이냐”고 분노했다.

또 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은 얼마 전 간담회 자리에서 “구조조정 과정에서 적자를 내도 미래수익성이 있는 회사에 대해 신용평가회사가 나쁘게 평가하는 것은 잘못”이라며 신용평가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A투자신탁운용사 임원은 “금감위원장의 발언은 정책 실패로 빚어진 금융권 혼란과 그에 따른 신용위험을 신용평가기관의 탓으로 돌리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부 개입, 평가 시스템 망친다〓정부의 압력에 못 이겨 이 달 초 한 신용평가기관이 현대건설 CP를 ‘투자적격’ 등급으로 상향 조정했지만 시장의 반응은 썰렁했다.

정부의 입김으로 올라간 신용등급이라는 사실을 투자가들이 뻔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한 신용평가사의 선임연구원은 “정부가 특정한 목적을 위해 신용평가결과를 주물러 보려 한다면 이는 시장을 너무 얕잡아보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시장의 불신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

증권연구원 오승현 박사는 “신용평가기관은 금융업계에서는 언론의 역할을 하는 곳인데 이를 통제하는 것은 투자자들의 알권리를 침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학교수는 “무디스나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 같은 공신력 있는 신용평가회사는 자율성이 최대한 존중되는 풍토에서만 나올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며 “정부의 개입이 지속될 경우 국내 기업 신용평가 시스템 자체가 붕괴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박정훈기자>sunshad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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