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포커스]한국인 첫 英 상장기업 총수 서동호 회장

  • 입력 2001년 2월 22일 18시 53분


“싸우지 않고 이긴다.”

전시(戰時)도 아닌 터에 무슨 싸움이랴 싶겠지만, 현대인에게 하루하루는 전쟁의 연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취업 승진 비즈니스 정치…. 어느 것 하나 치열하지 않으랴. 21일 영국 런던에서 개(犬)경주업체인 BS그룹 회장에 취임한 서동호(徐東澔·55)일본 도쿄플라자그룹 회장은 손자가 일찌기 최선의 병법이라 일컬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 경영철학으로 한국인 최초의 영국 상장기업 총수가 됐다(본보 22일자 A30면보도). 단돈 40만엔을 들고 빠찡꼬 사업에 뛰어든지 30년 만에 일본인도 못했던 영국 런던증권거래소 진출에 성공한 것이다.

빠찡꼬는 야키니쿠(불고기)와 함께 재일교포의 양대 산업으로 꼽힌다. 일본 자동차산업에 버금가는 28조엔(한화 약 280조원) 시장규모를 지닌 거대산업이다. 이 빠찡꼬시장의 70%를 귀화인을 포함한 재일교포가 장악하고 있다.

서회장의 도쿄플라자는 업계 10위 안팎, 교포사회에서는 1, 2위로 꼽히는 단단한 기업이다. 한국국적을 지닌 그는 영국 진출 발표를 앞두고 서울에서 기자와 만나 “유럽과 미국, 일본을 연계한 게임비즈니스 천국을 건설할 구상”이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그가 빠찡꼬에 뛰어든 것은 와세다대학 상과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71년. 민족주의자로 널리 알려진 부친 서채원(徐彩源)씨는 히로시마에서 일본 최대의 빠찡꼬사업을 하고 있었지만 아들에게 기계하나, 돈 한푼 주지 않았다. 새로운 조직이나 일을 만들어가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아무래도 비즈니스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나는 정보가 곧 돈이요,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에서는 비즈니스의 대부분이 서쪽에서 시작돼서 동쪽으로 옮겨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라오케도 나고야에서 처음 개발됐는데 도쿄까지 전파되는데 2년이 걸렸지요. 70년경 나고야에 빠찡꼬의 일종인 ‘장큐’가 유행한다는 정보를 들었습니다. 이걸 도쿄에서 하면 돈이 되겠다는 직감이 생겼습니다.”

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게 위치다. 무조건 전철역을 끼고 있어야 했다. 가진 돈은 40만엔 뿐. 나가노역 앞에 새로 짓고 있는 빌딩의 주인을 찾아 “5년 할부로 하되 당장은 돈이 없으므로 이자를 좀더 물겠다”는 조건으로 1층을 세냈고 기계 70대를 리스했다. 그해 10월에 도쿄 최초의 장큐 빠찡꼬장 문을 열었다. 대박이었다. 1년만에 모든 빚을 갚았다.

“두번째 가게는 74년 우에노역 앞에 열었습니다. 서울로 치면 명동에서도 목이 제일 좋은 곳이지요. 한겨울에 기계 30대를 렌트해 트럭에 실었는데 혹시라도 기계가 넘어져 깨질까봐 나도 짐칸 위에 올라가 기계를 껴안았습니다. 날은 추워도 가슴은 터질 것 같았습니다. 아, 이런 기쁨 때문에 비즈니스를 하는구나 싶었습니다.”

한국인이 일본땅에서 살아가는데 어려움이 없을 리 없다. 그러나 서회장은 어눌하지만 분명한 말투로 “사업을 하다보면, 또 살다보면 누구나 힘들 때가 있다. 한국인도 그렇고, 일본인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것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대신 일 자체에 대한 도전을 즐긴다”고 했다.

“나는 전쟁을 하지 않고 이기는 게 모든 비즈니스의 원칙이라고 생각합니다. 손자병법을 보면 안싸우고 이기는 것이 최선이고, 싸우려면 절대적 힘으로 초장에 압도해야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예를 들면 기계 200∼300대 정도인 가게 옆에 기계 600대에 주차장 완비한 대형 빠찡꼬장을 세우면 피한방울 안흘리고 전쟁에서 이기게 됩니다. 손자병법대로, 원리원칙대로 하면 승리합니다.”

약한자에 대해 동병상련의 감정을 갖고 있는 기자가 “하지만 절대적 힘으로 압도하고 싶어도 돈 없거나 능력없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큰 종이에 만년필로 손자병법을 설명하던 서회장은 만년필 뚜껑을 덮으며 하하 웃었다. 돈 40만엔으로, 더구나 일본땅에서 한국인의 이름으로 오늘을 일군 그에게 “돈이 없는데…”하고 현실을 탓하는 것이 딱하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는 46년 전남 순천 부근의 시골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열네살 나이에 독립운동을 하겠다며 순천서 서울까지 걸어서 올라갔던 민족주의자였다. 어찌어찌하여 일본에 건너간 부친은 한겨울 추위에 떠는 동포에게 외투까지 벗어주었다가 폐병에 걸려 폐를 절반 잘라냈다.

건강 때문에 정치운동을 할 수 없게 되자 먹고 살기 위해 시작한 것이 빠찡꼬였다. 부친은 여기서 번 돈으로 교포자제를 위해 소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지었고, 교포대상의 신용금고를 만들었으며, 양심적 지식인들의 잡지인 ‘삼천리’를 12년 간 발행했다.

“나는 여덟살 때 선친이 있는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때는 일본과 국교가 없었으니까 말하자면 밀항을 한 거지요. 불법체류자 신분이어서 그 문제가 해결된 소학교 6학년 때야 비로소 학교에 갈 수 있었습니다.”

‘조센징’이라고 차별받은 기억이 없느냐는 질문에 그는 “애기들 사회니까 일본인도 공부못하면 이지메당할 수 있다. 나는 특별히 한국인이기 때문에 차별받는 것은 느끼지 못했다”고 말했다. “좋아하는 여학생이 있는데 국적이 달라 결혼못하든지 할 수도 있지만…”하길래 “당신도 그런 경험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서회장은 “누구나 경험한다”며 그냥 웃었다.

87년, 외아들인 그에게는 하늘같았던 부친이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한두해는 아무 일도 못할 정도로 충격이 컸다. “고통 속에서 선친께서 하던 일을 다시 돌아다 보게 되었습니다. 가족보다 민족을 먼저 생각하는 것을 보면서 솔직히 한때는 쓸데없는 일을 다 하신다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왜 젊을 때는 자기 욕심만 내지 않습니까.”

부친이 83년 순천에 세운 효천고교에 더욱 애정을 기울이고 교포에게 장학금을 주는 한국교육재단(현 이사장)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고국의 젊은이를 키운다는 기쁨도 사업재미 못지 않았다. 청소년교육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서회장에게 이지메나 원조교제, 학교붕괴와 같은 일본의 청소년문제가 어째서 한국에 금방 흘러들어오는지 물었다.

럴 수 밖에 없습니다. 학교구조가 비슷하고 사회구조도 비슷한데다 일본은 아무래도 우리보다 조금 빨리가고 있지 않습니까. 영국과 미국의 명문 사립고교에 가보았더니 학생 1명에 교사 1명 식의 고품질 교육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이나 우리나라는 사립학교의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많은 학생들을 모아놓고 군대식으로 교육할 수 밖에 없으니 청소년문제가 나타나는 것이지요.”

청소년문제에서 한국이 일본을 따라간다면, 그렇다면 다른 분야에서도 우리나라가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물어보았다. 서회장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종이와 만년필을 꺼내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많이 생각해보았는데…경제적인 면에서는 힘들 것 같습니다. 일본을 칭찬하려는 게 아닙니다. 일본은 자동차 컴퓨터 등 완성품이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5% 정도이고 나머지 75%는 부품을 수출합니다. 미국 전투기의 부품 대부분도 일제입니다. 일본제품은 100만개에 불량품이 한개 정도 나올만큼 정교하기 때문입니다. 이름도 잘 모르는 작은 회사에서도 그렇게 철저합니다. 이에 비하면 한국은 어떻습니까.”

표정이 어두워지는 그에게 “한국은 당신에게 뭘 해준 것이 없을 텐데 뭘 그리 안타까워하느냐”고 짐짓 물었다. 그는 “젊었을 때는 싫기도 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것이 핏줄 아니겠는가.

“나이들수록 판소리 음식 옷…한국의 것이 다 좋아집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가 한국에 있었기 때문에 내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닙니까. 본능같은 것이지요.”

그러면서도 빠찡꼬사업을 한국에서 해볼 생각은 없다며 밝게 웃었다. “여기서 안해도 일본서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요. 하하.”

<김순덕기자>yuri@donga.com

▼서동호 회장은?▼

△1946년 출생

△1972년 와세다대학 상과 졸업

△1971년 도쿄플라자 설립, 빠찡꼬장 도쿄 16개·히로시마 1개 운영, 2000년 매출 800억엔(한화 약 8000억원) 종업원 1025명

△좌우명〓도전 그리고 지족(知足·제 분수를 알아 만족할 줄을 앎)

△취미〓고전 특히 역사서 읽기. 남도 판소리 감상.

△존경하는 인물〓줄리어스 시저. 세계화의 비전을 지닌 인물이므로.

△가족〓부인과 2남1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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