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규민/후지모리와 수구초심

  • 입력 2000년 11월 21일 18시 54분


일본인들의 페루이민은 101년 전에 시작됐다. 왜 그들이 지구의 꼭 반대편에 있는 잉카제국을 찾았는지는 신비스러운 일이다. 초창기 사탕수수밭에서 막일을 하던 790명 일본인이민은 이제 10만여명으로 불어나면서 이 나라의 경제계와 전문직종을 장악했다. 1990년 이민 2세인 알베르토 후지모리가 남미 최초의 비스페인계 대통령이 되면서 일본과 페루의 유대는 더욱 강해졌다. 전통적으로 페루정권을 장악해온 리마해안 출신 백인지도자들을 제치고 농업학자 후지모리가 일약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경제파탄으로 절망에 빠진 국민이 경제대국 일본의 원조를 기대해서였다.

▷후지모리가 돈 한푼 안들이고 트랙터를 타고 다니며 빈민층을 설득해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그 소식을 들은 일본인들은 아침식사 전인데도 정종(청주)잔을 높이 들고 ‘반자이(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이역만리 타국땅에서 같은 핏줄이 대통령에 당선됐다니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그 후 일본은 23억달러의 정부개발원조를 퍼붓고 천문학적 수치의 투자를 쏟아내면서 기대에 부응하려고 노력했다. 남미를 뒤뜰로 여기는 미국도 그렇게는 못했다.

▷후지모리는 그러나 집권한 지 2년 만에 친위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하고 헌법을 고쳐 철권통치를 시작하면서 검은 속내를 드러냈다. 1996년 말 게릴라들이 리마주재 일본대사관저를 점령하고 외교관들을 인질로 테러를 벌인 것은 일본을 등에 업고 전횡을 해 온 후지모리에 대한 경고의 시작에 불과했다. 급기야 올 들어 헌법상 금지된 3선의 벽을 넘으면서 그는 몰락의 길에 들어섰는데 그게 집권 꼭 10년의 일이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은 양의 동서에 관계없는 진리였다.

▷후지모리는 자신을 후원해 준 일본을 배신했다. “일본인들이 자신들보다 열 배나 더 부지런하고 정직하다”고 여겨 온 페루인들의 기대도 저버렸다. 그런 후지모리가 페루국민의 심판을 피하는 길로 조국을 선택했고 일본은 ‘돌아온 탕자’를 가슴에 품으려는 모습이다. ‘우리’중시의 유교문화권이 보여주는 집단지향성 행태의 전형이다. 일본이 핏줄에 대해 보여 준 그 넓은 가슴으로 과거 식민지시절에 대한 반성을 수용하지 못한다면 이는 일본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규민논설위원>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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