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충식]그르친 자들의 죄악

  • 입력 2000년 9월 8일 18시 33분


미국이 알래스카를 단돈 720만달러에 러시아로부터 사들인 얘기는 요즘 TV광고에도 자주 나온다. 석유 매장량만 해도 100억배럴이 넘고, 한 해 300만명의 관광객이 찾는 웅장한 대자연의 땅 알래스카. 러시아를 견제하는 군사방위적 가치까지 따진다면 알래스카의 ‘값’은 계산조차 불가능하리라고 한다.

이런 횡재의 주역은 1867년 당시 국무장관 윌리엄 수어드였다. 그러나 그는 ‘횡액’에 시달려야 했다. 단지 얼음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 불모의 땅에 거금 720만달러나 처박았다 해서 숱한 욕을 먹었다. 의회에서도 알래스카를 ‘수어드의 얼음 박스’라고 비웃었다. 이제 세월이 흘러 미국 사람들은 알래스카의 한 조그만 항구에 ‘수어드’라는 이름을 남겨놓았다. 그의 혜안(慧眼)에 대한 보답이다.

일본 제2의 도시 오사카에는 폭이 43.6m나 되는 미토스지라는 이름의 대로(일방통행)가 있다. 오늘날 인구 880만명의 대도시 오사카를 상징하는 길이다. 이 길을 닦기로 한 것이 1921년이었는데 그때 수도 도쿄에도 그런 규모는 없었다. 그 때문에 중앙정부로부터 분에 넘친 짓이라 해서 ‘견제’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지금은 한 세기 앞을 내다본 선견지명(先見之明)의 도로, 오사카의 자랑이 되고 있다.

국가나 기업이나 개인이나 앞을 내다보고 투자하고 개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미래를 꿰뚫어 보는 비전과 나름의 치밀한 타산이라는 것도 말처럼 쉽지 않다. 나아가 그 승산과 결과를 미리 보여주고 검증하기는 불가능하다. 또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다. 게다가 많은 저항과 반대를 무릅써야 한다. ‘돈이 많이 든다’ ‘장래성이 불투명하다’ ‘기득권이 침해된다’ ‘환경 문제가 생긴다’는 등 나름의 이유가 붙는다. 심지어 노예해방이나 여성참정권(투표권) 부여 같은 대의명분이 뚜렷한 인류사적인 개혁도 당대에는 ‘정치적 득표 전략에 불과하다’는 반발과 저항에 부딪혔던 것이 역사다.

역사는 멀고 저항의 목청은 가깝다. 늘 그렇듯이 그 정당성 타당성이 입증되기까지 세월이 흘러야 한다. 하지만 변화가 두렵고, 잃는 것에 성난 일부의 행동은 당장 무섭고 끔찍하다. 알래스카 거래에서처럼 ‘얼음 덩어리에 혈세(血稅)를 퍼붓는다’는 식의 비아냥, 미토스지 대로처럼 ‘경제성 현실에 안 맞는 큰길이나 만드느냐’는 반대는 귀에 쏘옥 들려오고 지지자도 많다. 링컨의 노예해방이나 루스벨트의 여성참정권 부여에 대한 당대의 비판 조소에도 날카로운 일면은 있다.

그러나 세월은 마침내 누가 크게 옳았느냐는 가리고 만다. 대신 오판 무지 이기심(利己心)으로 ‘그르치려’하거나 그르친 사람들의 이름은 잘 드러나지 않고 그들의 죄악은 기록에서 찾기 어렵다. 그래서 역사에 오판과 어리석은 짓은 자꾸만 되풀이되는 것인가.

수어드와 비슷한 시기의 조선인으로 김정호(金正浩)를 떠올리게 된다. 그는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죄로 죽어야 했다. 당시 지도는 서양은 물론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국가의 필수품이었다. 그가 제 발로 산야를 누벼 제작한 정밀지도를 나라에 바치자 돌아온 것은 ‘국가기밀 누설’이라는 벌이었다. 목각판 지도는 불태워지고 그는 옥에 갇히는 몸이 되어 1864년 옥사했다. 나는 대원군 집권 시절, 김정호를 죽여야 한다고 외친 사람들의 이름을, 그들이 내세운 주장을 알아보고 싶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숱한 난제에 관해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의약분업에 불만을 품은 의사들의 파업, 새만금간척사업의 타당성 여부, 경의선 재개통의 득실과 안보상의 문제점 여부, 심지어 서울시 난지도에 퍼블릭골프장을 만드는 것이 옳은가 잘못인가에 이르기까지….

정부를 포함한 어느 일방의 권위주의나 집단이기주의 또는 무지 오해 기만 등이 뒤섞인 채 혼란은 증폭되고 문제해결의 길은 멀어 보인다. 우리도 나름대로 숱한 과학적 데이터와 경험, 전문가가 있고 컴퓨터 시뮬레이션 기술도 있다. 객관적 타당성을 가리는 데 훨씬 유리해진 세상이다. 생떼와 우격다짐으로 일을 그르치려는 자들을 우리 시대에 가려낼 수는 없는가. 개혁할 일을 하고, 후세의 재앙이 될 일을 피하는, 멀리 보고 옳은 선택을 하는 것이 불가능은 아닐 것이다.

<김충식논설위원>seesche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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