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허정/의약분업 서둘면 그르친다

  • 입력 2000년 9월 5일 18시 32분


필자는 의과대학과 보건대학원에서 약 40년 동안 예방의학과 보건학을 가르치다 정년퇴직했다. 어느 나라에서나 임상의사들은 예방의학이나 보건학을 공부한 의사를 좋아하지 않는다. 의료계 문제점만 꼬집는다고 미운 오리새끼 취급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번 의약분업 분쟁에서도 임상의사나 병원편을 들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바 없다. 그러나 이 분야를 공부한 사람으로서 상식에 어긋난 논쟁이 계속돼 의견을 밝히고자 한다.

첫째, 강제로 의약분업을 해서 성공한 나라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서양 역사를 보면 의사와 약사의 관계는 언제나 상호보완적이었다. 특히 의사가 진료하고 약사가 약을 조제하는 관행은 의사와 약사간의 마찰이나 정부 규제를 통해 얻어진 것이 아니다. 중세 이후 아라비아의 알코올증류법과 연금술이 유럽에 들어오고 제약산업이 발달하면서 자연스럽게 의사들이 약의 조제를 약사에게 의뢰하기 시작했다. 의사들의 조제권을 약사가 억지로 가져간 것이 아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약을 떠난 의사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약방문만 내주고 의료비를 받는 관행은 없었다. 드라마 ‘허준’에서 보았듯이 고명한 의사는 약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본초학(本草學)에 조예가 있어야 했다. 이런 의료 문화와 관행 때문에 생겨난 것이 20세기 이후 아시아에서 계속돼온 의약분업 분쟁이다. 일본도 메이지유신 이후 유럽의 의료제도를 들여왔다. 그러나 의사들이 약을 조제하던 관행은 계속됐다. 그 결과 약의 오남용이 문제돼 정부가 의약분업을 추진했지만 실패해서 현재는 임의분업을 하고 있다.

두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의약분업이 되면 의료비가 더 들고 국민이 많은 불편을 겪게 된다는 점이다. 비용 증가와 불편에 대한 국민적 합의와 의사 약사의 협조 없이 강제로 하는 의약분업은 성공하기 어렵다. 일본도 처음에는 완전 의약분업을 꾀했지만 돈이 많이 들고 국민이 불편해서 결국 환자에게 선택권을 주어 의사가 조제하는 약이나 약사가 지어주는 약 중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환자에게 주었다.

세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보건의료 개혁의 종합적인 청사진과 장기계획 아래 추진돼야만 의약분업은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진찰료 약값 주사료 조제료 등 의료행위별로 수가가 지불되는 행위별 개별의료수가제를 유지하면서 의약분업을 하면 의사의 수입은 절반 이하로 떨어지게 된다. 의사들의 집단이기주의라고 매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현행 의료수가체계 아래 의약분업이 되면 개업의는 살아남을 길이 없다. 은근한 뒷거래로 대형병원의 처방을 얻어내지 못하는 동네약국도 문을 닫게 될 것이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환자 얼굴만 보고 약을 처방해줘도 의사는 최소한 20달러나 30달러는 받는다. 약값은 대개 5달러를 넘지 않는다. 따라서 법으로 금지하고 있지 않지만 의사들은 약을 조제하지 않는다. 이런 의료행위에 대한 기술료 개념이 도입되지 않고는 의사들은 계속 분업에 반대할 것이고 강제로 분업을 한다면 본인 부담을 올리거나 과잉진료를 해서 채산성을 맞추려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피해는 국민에게 돌아갈 것이다.

따라서 의약분업은 근본적인 의약계의 개혁 없이는 성공하기 힘들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나라의 보건의료정책은 그동안 땜질행정으로 일관돼 왔다. 장기적인 인력계획도 없었고 21세기에 걸맞은 의료제도의 청사진도 없었다. 이런 현실에서 의약분업만 분리해서 실시한다고 성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네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의약분업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다. 의약분업은 약의 오남용을 막기 위한 하나의 정책수단이지 그 자체가 의료개혁의 목적은 아니다. 정부가 주도하는 강제적인 의약분업 외에도 약의 오남용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우리나라에선 너무 빨리 큰일을 해내려는 과잉의욕 때문에 실패하는 수가 많았다. 현재 추진하고 있는 의약분업도 그렇다. 종합적인 보건의료 개혁의 청사진 아래 현실적으로 접근해 나가야겠다. 그래야만 우리나라 의료체계를 떠받치고 있는 동네 의원과 동네 약국도 살고 국민도 큰 불편없이 올바른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동네의원과 약국이 사라지면 더 큰 문제와 부작용이 생긴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허정(서울대 보건대학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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