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나는 세상]'들꽃피는 마을' 김현수목사

  • 입력 2000년 3월 31일 20시 52분


김현수목사(46)가 그들을 처음 만난 건 94년4월 경기도 안산의 한 교회에서 담임목사를 맡고 있을 때였다.

어느날 새벽기도를 하려고 교회문을 열다가 교회 한구석에 널브러진 10대 초반의 청소년들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남자아이 여섯, 여자아이 둘. 서둘러 깨워 쫓아냈다.

그러나 아이들은 밤마다 교회에 들어와 잠을 잤다. 쫓아내는 것도 한두번, 하루이틀 낯이 익자 아이들과 친하게 됐다. 한두놈 얼굴이 안보이면 슬슬 걱정이 됐다.

아이들의 '상처'를 알게 된 것도 그즈음. 아이들은 사실상의 고아들이었다. 부모의 이혼 가출 학대를 견디다 못해 가출, 같은 처지의 친구들과 무리지어 다녔다. 본드를 흡입하고 빈집털이 소매치기 등으로 제멋대로 살고 있었다.

마음 한구석엔 절망 분노 원망을 꾹꾹 눌러담고 있으면서도 또다른 구석에선 따뜻한 사랑을 목말라 했다. 더이상 아이들을 내칠 수 없었다. 교회 한구석에 잠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이번엔 주민과 교인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질 나쁜' 아이들이 들락거리면 교회 이미지에도 안 좋고 자기네 아이들까지 물든다는 거였다. 더이상 버틸 수가 없어 8개월 뒤 교회옆에 10평짜리 아파트를 얻어 아이들 집을 마련해주었다. 들락거리는 아이들이 한때 50명이 넘었다. 이곳에서도 주민들 데모로 3개월만에 쫓겨났다. 구(舊)반월의 폐농가에서 6개월, 목장에서 2개월, 잘 곳을 못 구하면 여인숙도 빌리고 어떤 때는 봉고차에서 재우기도 했다.

이렇게 떠돌이 생활 속에 정작 변한 것은 김목사였다. 어린 나이에 임신하고 출산한 여자아이, 가스를 불다가 온몸에 화상을 입은 남자아이, 유흥가를 전전하며 만신창이가 된 아이…. 처음에 김목사는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려고 했다. 수없이 화를 냈고 벌을 주었다. 진이 빠지고 절망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깨달았다.

"내가 지금 싸우고 있는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내 안의 분노, 내 안의 편협함 이기심과 싸우고 있었던 거예요. 내 안의 천덕꾸러기를 발견한 셈이죠. 그때부터 아이들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고 있었다. 어느날 경식이(14)가 찾아 왔다. 엄마는 일찌감치 집을 나갔고 맹인인 아버지는 술만 먹으면 두들겨 팼다. 경식이는 말이 없었다. 잠잘 때도 옷을 껴입고 책상밑으로 기어들어갔다. 정신과 치료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즈음, 갑자기 그의 얼굴에 웃음이 비치기 시작했다. 신기했다. 이유를 알게 된 것은 얼마 뒤였다.

어느날 새벽 김목사는 아이들 방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에 끌려 방문앞에 섰다. 아이들이 도란도란 자기들이 살아온 얘기를 진지하게 털어놓으며 서로의 상처 를 쓰다듬고 있었다. 경식이를 변하게 한 것은 바로 형 누나 동생들의 사랑이었다.

그날 이후 김목사는 아이들을 위해 '울타리'를 만들었다. 뜻있는 사람들을 모으고 아이들을 3∼4명 단위로 쪼개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 '들꽃피는 마을'을 만들었다. 그리고 안산시 와동의 작은 빌딩 사무실에 '들꽃피는 학교'(0345-486-8838·www.wahaha.or.kr)도 열었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다시 책을 펴들고, 책이 싫으면 자기가 원하는 기술을 익힌다. 고아원이나 영아원 교도소 봉사활동도 중요한 과목이다. 지금 들꽃피는 마을의 가정은 열 군데가 넘는다. 아이들도 40명 가량 된다.

"경제 성장의 그늘에서 버림받은 아이들을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손가락질 하지만 저는 그들을 통해 진정한 사랑을 배웠습니다. 들꽃은 아무도 돌보지 않는 벌판에서 꿋꿋이 살아가며 아름다움을 피워냅니다. 저는 우리 아이들이 모두 들꽃처럼 자라나 자기의 고통을 '다른 사람의 고통을 치유하는 약'으로 만드는 일을 해낼 것으로 믿습니다."

<안산=허문명기자>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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