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이어령/'문화의 세기' 첫 아침에

  • 입력 1999년 12월 31일 19시 05분


지금 이 지구에는 3000, 더 자세하게 분할하면 8000 정도의 각기 문화 양식이 다른 민족이 살고 있다. 국가 수는 겨우 15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오늘날의 국민국가가 문화의 동질성을 밑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경제의 이해관계를 전제로 한 인위적인 통합 집단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동서 냉전이 사라지자마자 세계 도처에서는 국민국가의 해체와 분쟁이 벌어지게 됐다. 그것이 바로 구 소련의 해체이고 체코슬로바키아나 유고슬라비아 같은 동구권에서 벌어지고 있는 종족 분쟁이다.

그와 반대로 분리가 아니라 통합을 하는데도 유럽연합(EU)과 같이 문화적 동질성을 바탕으로 삼는다. 냉전 이데올로기시대에서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이었던 터키가 EU에서 배제됐던 것은 그들의 문화가 이슬람권에 속했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 시대에는 한 편이었던 나라가 냉전 종식 이후의 상황에서는 오히려 등을 돌리는 현상이 빚어진다.

이러한 변화를 분석해 세계에 큰 충격을 던진 것이 바로 하버드대의 새뮤얼 헌팅턴 교수의 ‘문명의 충돌’이다. 그 교수는 ‘신시대의 분쟁은 지금까지 이데올로기나 경제를 목적으로 한 대립과는 달리 문화적 요소에서 생겨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지금까지는 정치원리와 경제 원리가 세계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지만 새로운 세기는 문명 문화의 패러다임에 의해 움직이게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역사의 종언’에서 사회주의의 멸망을 예언했던 프란치스 후쿠야마 역시 ‘신뢰’라는 저서를 통해 문화가 국가와 그 경제의 승패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라고 예견한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라고 해도 인간을 신뢰하는 문화를 ‘사회 자본’으로 하는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의 차이에서 전연 다른 양상이 벌어지게 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문화 상대주의론자인 헌팅턴이든, 문화보편주의의 입장에 서 있는 후쿠야마든 그들의 입장과 관계없이 앞으로 세계구도는 모두 문화적 파워를 기축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치된다. 정치도 경제도 문화적 동질성을 기축으로 삼지 않고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세상이 온다는 것이다.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상징되던 20세기의 세계시스템에 통합력이라는 새로운 문화경쟁력이 합세하게 된 것이 우리가 맞게 되는 21세기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농경사회란 무엇인가. 땅을 약 30㎝ 정도 파서 씨앗을 뿌려 먹고 살아가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산업사회는 무엇인가. 땅을 300m 정도 파서 석탄이나 광석을 캐 기계를 만들어 산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정보지식사회에서는 무엇을 파는가. 사이버 스페이스는 땅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뇌와 마음속에 있다. 미래의 자원은 땅속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가슴과 머리에 들어있다. 그것이 바로 나라와 세계를 풍요롭게 하는 문화적 자원이다. 한국에는 지하자원이 없다고 하지만 문화의 시대에 오면 일본이나 미국보다도 풍부한 문화 자원이 있다.

그 자원 가운데 하나가 21세기에 가장 필요로 하는 융합과 조화의 문화이다.

태극기와 프랑스의 삼색기를 비교해 보면 이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빨갛고 노랗고 파란 삼태극에는 천지인의 세가지 다른 가치를 나타내는 색깔이 둥근 원으로 서로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그러나 원형이 아니라 선형으로 되어 있는 프랑스의 빨강 하양 파랑의 자유 평등 박애의 색깔은 영원히 마주침이 없는 평행선을 긋고 있다. 삼태극은 어느 것이 위고 아래인지 둥근원이라 서열이 없지만 삼색기는 좌와 우와 중간으로 분할돼 각기 서로 다른 자기 위치를 고집한다.

색채가 계층화돼 있다는 말이다. 태극기가 원융회통의 사상을 시각화한 것이라면 프랑스 깃발은 가치의 삼항 대립과 삼 분할을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깃발의 도형만이 아니라 먹는 음식, 사는 집, 사고의 체계와 구조에 이르기까지 한국문화는 비빔밥의 맛처럼 융합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세계화 정보화에서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서로 이질적인 것을 이종배합하는 융합문화이며 그 원형이 한국에는 캐지 않은 노다지로 가득 묻혀 있다. 21세기가 문화의 세기라면 동시에 그것은 한국의 세기이다.

이어령(새천년준비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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