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297)

  • 입력 1999년 12월 14일 19시 39분


얼마나 되었어요, 여기 오신지.

작년에요. 그런데… 여기서 뭐 하세요?

하고 나도 그에게 물었습니다.

연구원이에요. 여기 공과대 연구소에 적을 두고 있어요. 헌데 어디… 집에 가는 길입니까?

아뇨, 산책 나왔어요.

그럼 잘됐군. 나 저녁 얻어 먹으러 가는데 같이 갑시다.

저어 그건 좀….

하면서 나는 저절로 걸음을 늦췄는데 그가 계속 앞으로 가면서 손가락을 세워서 흔들어 보이는 거예요.

빚 갚을 기회를 안줄 거요.

나는 다시 그의 걸음걸이에 바쁜 걸음으로 보조를 맞추고.

어디 가는데요…?

후배 유학생이에요. 괜찮아요. 된장찌개 먹고 싶지 않아요?

된장 냄새를 연상하고 그랬는지 아니면 그의 자연스러운 초대에 이끌렸는지 어쨌든 나는 그와 함께 로젠하이머 스트라세 쪽으로 걸었어요. 그가 자기 이름을 말했어요. 이희수래요. 나도 이름을 말하고. 그는 어느 대학의 조교수였지요. 국내 학위자가 바깥 바람도 쐬고 자료도 모으고 이력도 쌓고 뭐 그런 식 있잖아요. 하여튼 나는 마음이 좀 놓였어요. 마흔 셋, 아니면 다섯쯤 먹었겠지만 겉 보기엔 제법 삼십 대 중반으로나 보였습니다.

나는 조금은 멋적어 하면서 그와 함께 어느 유학생의 집을 방문했어요. 아이는 없고 두 부부 뿐이었는데 남편은 과묵하고 성실해 보이는 사람이었고 아내는 공격적이고 신경이 곤두선 것 같더니 술이 좀 오르니까 우리에게 반말도 하고 남편에게 욕도 하면서 주정을 했어요. 그러나 별로 불쾌한 건 아니었어요. 그는 뒷바라지에 지쳤는지는 몰라도 잘난척 하지는 않았으니까요. 우리는 김치에 된장찌개에 상추 쌈과 삼겹살에 소주에다 마늘까지 아구아구 먹어댔어요.

밤 열 시 쯤에 그 집에서 나왔는데 이 선생과 나는 이미 오래 전에 만난 사이처럼 제법 친밀한 느낌이 들었죠. 그는 분명히 과학을 하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계통이 환경공학 쪽이어서 지혜가 있는 기계쟁이처럼 보였거든요. 사람의 일에 관한 잡지식이 제법 많은 듯했어요. 여기서의 쓰레기나 산업 페기물의 처리 과정을 연구 한다든가 그랬어요. 하지만 내가 그맘때의 한국에서 보았던 친구들처럼 급진적이진 않았어요. 이야기를 조용 조용 유모러스하게 진행하고 다분히 상식적이었습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그런 남자를 처음 보았거든요. 물론 정서는 안정되어 있었고. 그는 중산층 집안에서 햇빛과 바람이 잘 드나드는 창가에 놓인 관엽식물처럼 파란 없이 자란 게 분명해요.

빚 갚는다는 구실이 남아서 오월 중순경에 한번 더 만났지요. 내가 집 근처의 광장 건너편에 있는 이태리 식당 로마에서 저녁을 샀어요. 무슨 애기를 했는지는 다 까먹었어요. 아주 오래 전에 아버지나 당신이나 영태 미경이들과 어느 자리에서 무슨 말이 오고 갔는지 시시콜콜 떠오르는데 어째서 그와의 이야기는 생각이 나질 않는 걸까. 몇몇 사적인 얘기도 있긴 했는데. 그는 삼 년 전에 이혼 했어요. 중학생인 사내 아이가 그의 모친과 살고 있대요. 나는 내 사연은 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에 대해서 옆 집의 마리 할머니 보다도 더 몰랐어요. 하긴 나중엔 다 알게 되었지만.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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