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세상읽기]제도의 벽 못넘은 '황혼이혼'

  • 입력 1999년 12월 13일 19시 56분


“나는 아내를 사랑하지만 결혼이라는 제도는 사랑하지 않아요.”

전임 독일 연방대통령 로만 헤어초크가 한 말이다. 그런데 한국에는 결혼이라는 제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꽤나 많은 것 같다. “배우자의 부당한 대우는 인정되지만 부부가 고령이고 결혼 당시 가치기준을 종합할 때 혼인관계가 파탄에 이르렀다고는 볼 수 없다”는 이유로 70대 할머니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은 대법원 판사도 아마 그런 사람일 것이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98년 한 해 동안 세 쌍의 부부가 생길 때마다 한 쌍의 부부가 이혼했다. 이혼한 부부 가운데 20년이 넘게 함께 산 사람들의 비율은 전체의 13.2%로 89년 4.8%에 비해 현저히 높아졌다. 이들은 모두 78년 이전에 부부의 연을 맺은 사람들이다.

대법원에서 패소판결을 받은 김할머니는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 남자의 아내요 네 자녀의 어머니로 살았다. 김씨의 남편은 이런 아내에게 욕설과 손찌검을 하고 돈이 많으면서도 제때 생활비를 주지 않는 등 학대를 했다.

이 판결을 한 대법원 판사에게 두 가지를 묻고 싶다. 첫째, ‘결혼 당시’인 40년대 한국 사회의 가치기준은 남편이 아내를 학대하는 것을 허용했는가? 유감스럽게도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법률적으로 처벌은 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이런 짓은 그 당시에도 떳떳하거나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백 보를 양보해서 당시에는 그랬다고 해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그럼 그런 가치기준이 언제 바뀌었나? 그걸 알아야 그 이전에 혼인한 아내들은 미리 이혼소송을 포기할 것 아닌가.

둘째, 부부가 이미 고령이라서 이혼해서는 안된다는 것도 그렇다. 도대체 여자는 몇 살이 될 때까지 이혼할 권리를 누릴 수 있는가. 50? 환갑? 또는 칠순? 김할머니로 하여금 이른바 ‘황혼이혼’을 결심하게 만든 ‘문제의 남편’은 나이가 들면서 의처증에 빠져 아내를 괴롭혔고 이젠 치매에까지 걸렸다고 한다. 대법원 판결은 똑같은 이유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리면서 “할머니는 정신장애 증상을 보이는 남편을 돌볼 의무가 있다”고 한 2심 재판부의 논리를 그대로 수용했다.

동냥은 못 줄망정 쪽박은 깨지 말라는데 이건 정말 해도 너무했다. 76세나 된 할머니가 도대체 무슨 수로 전문가의 간병을 필요로 하는 80대 치매환자를 돌본다는 말인가? 부당한 대우를 참으면서 52년을 살았다는 사실과 치매에 걸린 남편의 병수발을 할 의무 사이에 어떤 논리적 인과관계가 있는지 짐작조차 할 길이 없다.

일부 언론은 이 판결을 두고 “황혼이혼 등 가족 해체에 대해 일종의 경종을 울린 것”이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이건 가족의 해체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가족은 ‘사랑과 책임으로 맺어진 어른과 아이들의 공동체’를 말한다. 혼인신고나 호적은 그러한 공동체가 존재할 때만 의미를 가지는 형식에 불과하다. ‘사랑과 책임’이 존재하지 않는 가족 아닌 가족을 혼인이라는 제도의 틀에 옭아매 그 누구를 행복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유럽에는 혼인신고를 하지 않는 부부가 많다. 결혼제도의 틀에 들어가면 서로에게 나태해진다는 이유에서다. 언제든 상대가 떠나버릴 수 있다는 긴장감 때문에 끊임없이 배려하고 구애하면서 금실좋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걸 흉내내자는 게 아니다. 사랑과 보호의 대상은 사람이지 제도가 아니라는 걸 잊지 말자는 이야기다.

유시민(시사평론가)denkmal@hite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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