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권만학/만날수록 쌓여가는 신뢰

  • 입력 1999년 11월 1일 19시 07분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제5차 남북 해외학자 통일회의는 다섯 차례의 회의를 거르지 않고 참석한 내게 처음부터 멀리 떨어진 친구를 다시 만나는 반가움으로 다가왔다. 20세기를 마감하며 되돌아본 통일회의는 머릿속에서는 평행선을 달렸지만 적어도 점차 수렴하는 시각을 창출한 것으로 보인다.

분단 이래 최초로 남북이 주최한 제1차 통일회의에서는 노동당이 ‘극좌’냐, 아니냐를 두고 원색적인 격론을 벌일 정도로 남북은 멀리 있었다. 이후 우리 주최측은 비행기는 양날개로 난다는 균형성과 전문성 개념으로 회의를 조직했다. 또 북한 주최측과는 상호 민감한 문제는 사전 협의를 통해 의제에 넣지 않는다는 ‘지뢰제거’에 합의함으로써 유일한 남북 연례회의라는 기적을 낳기에 이르렀다.

‘지뢰제거’는 물론 회의의 정례화라는 성과를 만들어낸 반면 쟁점을 심층적으로 분석하지 못하게 하는 단점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 회의에서는 서로 거북한 문제들도 다루었고 양측의 태도도 감정적 격돌을 보인 첫 회의와는 달리 완숙함을 보였다. 통일회의가 비로소 본 궤도에 접어들었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북측은 주한미군 철수와 보안법 문제를 거론했으며 남측은 명시적으로 ‘적화위협’과 형법, 북한 인권문제를 지적했다. 양측 당국이 만나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로 성실하게 문제를 분석하고 상호위협 감소, 편익증대라는 방향에서 풀어나가야 한다는 점에 대부분의 참석자들은 의견을 모았다.

이번 회의에서 북측은 김대중(金大中) 정부가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려 하고 있으며 일본까지 공조체제로 끌어들여 반북주의적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특이한 것은 북한의 통일정책을 종합적으로 제시해달라는 우리쪽 부탁에 따라 북측이 제시한 발표문에 과거와 같이 선행조건이 포함되지 않았고 연방제의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미국을 예로 들었다는 점이다.

남측 일부 학자들은 햇볕정책이 북한 체제가 아닌 한반도 ‘냉전’을 녹여주는 햇볕을 의미하며 북한의 대미, 대일 접근을 지원하는 등 남북관계 개선의 중요한 전환의 계기로 활용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아직도 남북간에 차이는 크다. 북측은 여전히 통일3원칙 중 자주와 민족대단결을 강조했으며 남측은 평화와 신뢰를 주장했다. 이런 기본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통일회의는 남북 사이에 상당한 신뢰를 쌓게 만들었고 그 바탕 위에서 더욱 완숙한 현안 토론을 가질 수 있게 됐다. 만남이 신뢰를 낳고 신뢰가 수렴으로 연결된 좋은 예는 회의 종료 후 남북해외단장이 개인 자격으로 서명한 ‘공동평가서’에서 찾을 수 있었다. 북측은 남측이 강조한 기본합의서 실천 등의 내용을 수용했으며, 남측은 공동평가서라는 형식을 받아들인 것이다.

대부분의 참석자들은 남북관계가 진전되기 위해서는 서로가 자기성찰적 자세를 가지고 조건없이 만나 모든 문제를 호혜주의적 입장에서 풀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통일회의처럼 남북 당국이 이러한 자세에 합의할 수 있다면 평행선을 이어 달리는 통일의 기차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권만학(경희대교수·정치학)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