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259)

  • 입력 1999년 10월 31일 19시 59분


그들은 긴장된 얼굴로 미간을 찌푸리며 일어났다.

앞장서.

나는 대합실에 가득찬 인파를 이리 저리 피해서 화장실로 천천히 걸어갔다. 조바심이 생겼는지 점퍼의 교사가 내 등 뒤에 바짝 다가서서 잰걸음으로 걸으면서 속삭였다.

오현우씨 조심해요, 나 무장했어.

화장실에 들어서자 교사 한 사람은 입구에 남고 점퍼만 따라 들어와 일을 보는 내 옆자리에 나란히 섰다. 그가 점퍼 자락을 젖히고 자기 허리께를 보여 주었다.

이거 보이지?

재소자들 말로 닭 대가리가 가죽 집 안에 묵직하게 걸려있다. 그가 거울을 통해서 역시 거울 속의 나에게 말했다.

이러고 싶진 않지만 딴 맘 먹지말라고….

나는 말없이 웃어 보였다. 다시 인파를 헤치고 내가 앉았던 그 자리가 감방이기나한 것처럼 열중해서 찾아 돌아온다.

우리는 버스에 올랐다. 그들은 나를 맨 뒷자리 쪽으로 몰았다. 권총을 찬 교사가 투덜댔다.

뭐야 맨 뒷자리잖아.

주임이 말했다.

우리한텐 거기가 명당이야.

난 차 멀미를 한다구요. 뒷자리는 많이 흔들릴텐데.

그의 말에 나도 당장 멀미가 시작될 것처럼 메슥메슥했다. 나는 화창한 가을 햇볕 때문에 어지러웠고 무엇보다도 이 많은 사람들과 가까이 섞인채로 부대껴서 피로해 있었다.

차가 움직인다. 새로운 길들이 연이어 나타나고 낯 익은 경부 고속도로에 들어선다. 붉고 푸른 칠을 한 농가의 지붕들과 보고 싶던 먼 산들이 진보라색으로 부옇게 하늘 속에 떠 있는 게 보인다. 추수가 끝난 들판가에 묶인 나락이 열병식을 하는 것처럼 늘어서 있다. 감이 발간 점처럼 매달린 숲이 나부끼는 걸개그림 같이 휘이익 흘러간다. 비좁은 담장 안에서 지겹도록 보았던 까치도 여기서는 먼 곳까지 훨훨 거침없이 날아간다. 영화에 나오듯이 버스에서 뛰어내려 아득하게 보이는 들판 저 넘어 보라색의 산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고 싶다.

세 사람은 의자의 등받이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주임만은 버스의 속도가 늦춰지면 게슴츠레한 눈을 뜨고 여기가 어디쯤인가 살피고는 나를 힐끗 보고 다시 눈을 감는다. 나는 잠들지 못한다. 그리고 풍경을 한꺼번에 흡수해 버린다. 아마 돌아가면 쌓아둔 영양분을 아껴서 야금야금 섭취하듯이 머리와 가슴에 찍어서 압축해 두었던 이 그림들을 오랫동안 되새김질 할거였다.

나는 서울로 돌아왔다. 먼데서도 그 기미를 알아챌 수가 있었다. 들판은 없어지고 차츰 다닥다닥 붙은 상처나 흠집 같은 건물들이 도로변과 언덕이나 산 중턱에까지 많아지기 시작한다. 차는 거의 한 방향으로만 일제히 몰려가고 있는 것 같다. 흐리지도 않았는데 하늘은 벌써 뿌옇게 뭔가가 끼어 있다. 날아가는 새들도 보이지 않는다.

거리를 걷는 여자들이 보인다. 종아리가 치마 끝이 엉덩이가 머리카락에서 다시 내려가 뒤축을 잔뜩 세운 구두 굽으로. 젊은 여자는 자유다. 특히 멀리서 볼적에는 그렇다. 담배를 물고 와이셔츠 바람에 슬슬 건물 앞을 거니는 사내가 보인다.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 앞의 작은 무리들. 저것이 내가 쫓겨난 사회다. 다시 돌아갈 기한은 없는. 나는 이 버스의 흘러가는 유리창으로 밖에는 저기에 동참할 수 없다.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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