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걸 스탠더드]항공기 운송분쟁 급증…승객위주 선회

  • 입력 1999년 10월 21일 19시 11분


회사원 H씨(30)는 몇해 전 미국 출장 길에 황당한 경험을 했다. 목적지인 워싱턴DC 공항에 도착해보니 서울에서 화물로 부친 여행용 가방이 함께 오지 않은 것이다.

항공사 직원은 “뉴욕에서 국내선 소형 비행기로 옮겨싣는 과정에서 공간이 부족해 화물을 미처 다 못실었다”면서 “호텔 주소를 알려주면 며칠 안으로 배달해주겠다”고 말했다.

H씨는 옷가지를 비롯해 필요한 물건을 대부분 큰 가방에 넣어 부치고 손가방만 들고 비행기에 올랐던 터라 거세게 항의했지만 별 뾰죽한 수가 없었다.

항공사 직원은 이렇게 가방이 늦게 도착하는 경우에도 “약관에 피해보상 규정이 없다”고 설명했다.

H씨는 늦게라도 가방을 찾을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인 편이다. 항공화물이 아예 증발돼 버리는 사례도 간혹 있다.

대부분의 항공사는 약관에서 귀중품은 승객이 직접 들고 타라며 화물 분실의 책임을 될수록 지지 않으려고 한다.

화물이 도중에서 사라지면 화물의 종류나 가격에 관계없이 무게로 보상해준다. 소비자단체에 접수된 피해 사례를 보면 값이 비싸고 부피가 큰 결혼식 예복을 화물로 부쳤다가 무게만큼만 보상을 받은 사람도 있다.

항공기 이용이 보편화하면서 항공사와 승객 사이의 분쟁 사례가 날로 크게 증가하고 있다. 화물이 분실되거나 지연 운항, 추락 등 항공사 과실로 승객이 입은 손해를 배상하라는 법률 소송이 심심치않게 제기된다.

항공사는 손해 배상과 관련해 55년 만들어진 국제조약인 바르샤바협약을 최근까지 따르고 있었다. 항공 사고의 규모나 빈도는 크게 늘었지만 초창기에 만들어진 국제협약이 그대로 유지된 것이다.

협약에 따르면 항공운송인(항공사)의 책임은 승객 1인당 약 1000만원에 불과하다. 시일이 흐르면서 항공사들은 자체적으로 약관을 통해 1억5000만원까지 보상액을 올렸지만 여전히 항공사의 책임은 제한돼 있다.

대형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이 문제를 놓고 많은 논란과 분쟁이 일어났다.

97년 8월 229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한항공(KAL) 여객기 괌 추락 사고의 유족들도 항공사를 상대로 소송을 벌이고 있다.

대한항공은 유족들에게 보상금 장례비 위로금을 합쳐 승객 1인당 2억7500만원을 지급하겠다고 나섰지만 90건 정도만 집행됐다. 나머지 유족들은 국내와 미국에서 항공사와 법정 싸움을 벌이고 있다.

최근 40년 넘게 기본틀로 지켜졌던 바르샤바협약 체제에 변화의 새 바람이 불고 있다. 항공사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법 체계가 승객 위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11월 미국 연방법원은 항공사가 운항이 아닌 ‘서비스’를 제공하는 동안 발생한 승객의 피해도 책임져야 한다는 요지의 판결을 내렸다. 승객의 머리 위로 가방이 떨어지거나 승무원이 커피를 쏟는 등 서비스와 관련된 손해에 대해서는 항공사에 민사상 책임을 요구할 수 없다는 기존 판례를 정면으로 뒤집은 것이다.

올해 5월에는 국제민간항공기구(ICAO)가 바르샤바협약의 내용을 전면 수정했다.

항공사의 과실로 발생한 사고에서 항공사의 책임 제한을 폐지하고 항공사의 과실 여부와 관계없이 무조건 13만5000달러까지 보상하는 협약안을 확정한 것이다.

국내 항공사들도 이미 지난해 11월부터 책임제한 규정을 삭제했다. 그러나 괌 사고를 비롯해 그 이전에 발생한 사고는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

재판 관할지도 그동안 논란의 대상이었다. 바르샤바협약에 따르면 항공기 사고의 재판관할권은 △항공사의 주요 영업소 소재지 △항공권 구입장소 △최종목적지 등 3곳으로 제한된다. 피해자들이 소송을 벌이는 데 엄청난 불편을 겪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몇해 전 한국 외교관이 에티오피아항공 여객기에 탔다가 항공기가 괴한들에게 피랍돼 추락해 사망한 사고가 발생했지만 유족들은 소송을 포기하고 말았다.

재판관할권이 있는 곳이 한국이 아니라 재판 결과를 믿기 어려운 아프리카 국가였기 때문이다.

새로운 협약은 사고 당시 여객의 주소나 거주지의 재판관할권을 인정했다. 한국인이 다른 나라에서 항공 사고를 당해도 한국에서 소송을 진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연착 등 운항 지연으로 인한 피해를 항공사가 돈으로 보상하라는 법원의 판결까지 나오고 있다. 97년 3월 인도네시아 덴파사르를 출발해 자카르타 국제공항을 경유해 김포공항으로 향하는 가루다항공 여객기는 비행기 바퀴 작동대에 이상이 생겨 2차례 공항으로 회항하는 바람에 예정 시간보다 20시간 운항이 지연됐다. 이 여객기 승객들은 그냥 넘어가지 않고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법원은 항공사가 탑승객 75명에게 1인당 60만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96년 10월 김포공항에서 국내선 항공기의 출발이 기체 점검을 이유로 2시간 35분 지연됐다. 탑승객 가운데는 제주도에서 열릴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한 승객들이 있었다.

이들은 출발 지연으로 세미나 일정이 변경되고 일부 취소되자 소송을 냈고 법원은 1인당 10만원씩 250만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과실이 아니라 안전 점검을 위해 운항이 늦어져도 승객의 피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이다.

김갑유(金甲猷)변호사는 “국내에는 국내 항공운송에 관한 법률조차 없는 실정”이라면서 “항공기 이용이 보편화하는 추세인 만큼 국제 항공운송과 동일한 방향으로 법률 체제를 정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홍석민기자〉sm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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