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어느 미군병사의 '참회'

  • 입력 1999년 10월 8일 18시 28분


6·25전쟁 초기이던 1950년 7월25일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미군기의 무차별 기총소사를 피해 마을밖 굴다리 밑으로 모여든 수백명의 양민들에게 미군의 기관총이 난사됐다. 거의가 부녀자 어린이 노인이었던 피란민들 중 150∼200명이 그렇게 학살됐다. AP통신의 보도에 따르면 당시 미군 상급부대가 “그들(피란민들)을 적으로 취급하라”고 명령한데 따른 것이었다.

그로부터 49년의 세월이 흘러 당시 참전했던 한 미군 ‘노병(老兵)’이 입을 열었다. 사건 당시 미 육군 제1기갑사단 7연대 소속 기관총 사수(상병)였던 에드워드 데일리(68)는 동아일보 워싱턴 특파원과의 전화인터뷰에서 “그동안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힘든 세월을 살아왔다. 이제야 진실이 밝혀지고 다른 동료들도 고통스러운 기억의 치유과정에 동참하고 있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군인으로서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지만 결과적으로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데 대한 ‘회한’을 평생 떨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참회의 뜻으로 “앞으로 전우들과 함께 한국을 방문해 유가족과 생존자들에게 충심으로 위로의 말을 전하고 진정한 화해를 이루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노근리 양민학살 의혹사건’의 진상조사도 데일리의 말처럼 ‘진정한 화해’를 위한 공동노력의 정신 아래서 진행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살이 자행된 이유와 책임, 그리고 희생자 유가족에 대한 사과와 배상문제 등은 엄정하게 조사되고 처리되어야 하나 그것은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의 원혼과 유가족의 한(恨)을 달래고 가해자와 피해자간 ‘역사적 화해’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이는 데일리의 경우처럼 가해자 또한 전쟁의 비극이 낳은 피해자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노근리 양민학살사건 대책위원회’(위원장 정은용)는 2일 “노근리사건이 반미운동으로 비화되는 것을 우려하며 학살자 처벌은 원치 않는다”고 공식입장을 밝혔다. 대책위원회는 아울러 “학살사건을 시인해준 미군들의 용기와 양심을 높이 평가한다”고 말했다. 의연하고도 바른 견해이다.

그에 비한다면 현장을 방문했던 몇몇 국회의원들의 ‘한심한 발언’이나 미 정부에 비해 여전히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는 듯한 우리 정부의 태도는 유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노근리사건에 이어 마산 등지에서도 6·25전쟁 당시 미군에 의해 양민학살이 저질러졌다는 주민들의 주장이 잇따르고 있다. 이들 주장에 대한 조사도 이루어져야 한다. 어두운 역사일수록 햇빛 아래로 끌어내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다. 그것은 진정한 한미 우호의 길이기도 하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