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정채봉/고향가는 마음

  • 입력 1999년 9월 22일 17시 43분


그 사람의 귀향 스케줄은 첫 날부터 촘촘했다. 7시 출발. 12시 도착. 동창회 임원들과 점심식사. 1시20분 모교 방문. 장학금 전달. 3시 신생회사 개업식 참석. 6시 시의원과의 만찬…. 고향 형제들과의 식사는 3박4일 중 고작 당일 아침 한끼뿐, 그 다음 일정이 또 수첩을 꽉 메우고 있다.

▼졸장부의 과시행렬▼

그런데 도로 교통사정을 어느 정도 예상해 잡은 시간인데도 고향 인근 시 경계에 이르렀을 때 대형 사고가 발생해 차가 꼼짝달짝 못하게 되었다. 그는 우선 손전화로 점심 시간을 늦춰달라는 부탁을 했다. 시간이 흘러가는데도 차의 행렬이 풀릴 기미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는 목이 탔다. 운전기사에게 준비해온 음료수가 없느냐고 물었다. 가방을 뒤져본 운전기사가 사모님이 빠뜨린 것 같다면서 있지도 않은 휴게소 타령을 했다. 화가 나기 때문인지 목이 더욱 탔다. 그는 차를 갓길로 빼라고 말했다. 고교 시절 식목일에 이 산자락으로 나무 심으러 왔던 일이 생각났던 것이다.

‘약수터가 이 근처에 있었어.’ 그는 차에서 내려 체면 불구하고 철망을 넘었다. 오솔길로 들어서자 억새가 피어 오랜만이라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고, 구절초가 노오란 꽃망울을 내놓고 웃는 얼굴로 반겨주었다. 바위 틈새에 이르자 과연 짐작대로 작은 옹달샘이 있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물을 떠먹을 그릇이 없었다. 그는 양복 저고리를 벗었다. 넥타이를 풀었다. 그리고는 예전에 했던 대로 엎드려서 입을 수면에 대고 물을 들이켰다.

갈증이 가신 그의 눈에 그제서야 옹달샘 속에 드리워진 풍경이 보였다. 푸른 하늘과 흰 구름, 그리고 소나무와 참나무가 한가로이 거기에 있었다. 삼십여 년 전 예전 모습 그대로. 그러나 자기의 얼굴은 영 딴판으로 달라져 있지 않은가. 벗겨져 개기름이 흐르는 이마에, 무엇을 쫓고 있는지 날카로워진 눈동자며 탐욕스러워 보이는 콧등하며 입술.

한줄기 청량한 바람이 나뭇잎과 그의 머리칼을 함께 흔들자 그는 발작이라도 일으킨 듯 와이셔츠 단추를 풀었다. 그리고는 구두를 벗고 양말을 벗은 다음 풀섶 위에 벌렁 누웠다. 아아, 얼마 만에 풀섶에 누워서 바라보는 하늘인가!

이 짧은 우화는 여기에서 끝을 맺겠다. 더 이어볼 수도 있지만 내 결론은 너무도 작위적일 것 같아서 각자의 생각에 맡기고 싶다. 한 순간의 샤워처럼 그때만 마음의 불이 반짝 켜지고 말았을 수도 있고, 정말로 마음을 바꾸어 허세용의 자기, 치장용의 자기, 명예탐의 자기를 폐기처분하고 거듭난 귀향이 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음이 가난했던 시절의 고향 생각은 생각 자체만으로 순수의 세레를 받을 수 있었다. 물질의 풍요와 개인주의가 극도에 달한 오늘의 고향 방문은 졸장부들의 과시행렬을 보게도 된다. 형제간에도 장유유서는 사전 속에 처박혀 나올 일이 없다. 힘이 더 있는 아들이, 돈이 더 있는 딸이, 부모의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까.

▼동심으로 돌아가는 곳▼

이쯤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정리하고 넘어가야 한다. 고향이 왜 그리운가. 왜 명절 때가 되면 고생을 다 감수하고 고향에 가려 하는가. 물론 부모님이 계시기 때문이기도 하고 성묘를 해야 한다는 부담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한가지 더, 고향에는 마법의 신비가 있다.

‘이상한 편안함.’ 그렇다. 이 편안함이 있다. 일급 호텔의 안락함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어떤 권력의 의자에서도 맛볼 수 없었던 감미로움 같은 것, 이것이 돌담이 무너져 있고 흙먼지가 폴폴 날리며 두엄냄새가 흐르는 우리의 초라한 고향에 있는 신비인 것이다.

이 신비를 나는 ‘동심’이 생겨난 곳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걱정이 없었고 죄를 몰랐으며 잠자고 일어나면 늘 상쾌하기만 하고 늘 새롭기만 하던 아침. 심심하면 동생의 겨드랑이 밑에 손을 넣어 간지럼을 태워 함께 웃고, 무료한 수업시간에 책상 밑으로 짝꿍과 발싸움을 하여 키들거리던 동심. 이 동심의 본고장이니 이보다 더 편안한 곳이 어디 있겠는가.

자, 올해 귀향은 허세의, 치장의 가면을 벗어버리고 번거로운 약속에서 훌훌 놓여나자. 그리고 개구쟁이 시절의 모습으로 웃음소리를 날리며 고향의 골목길을 달려 동심의 세례를 흠뻑 받아오자.

정채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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