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엘리트공무원 『우물안 공직사회 싫다』

  • 입력 1999년 9월 8일 19시 24분


86년 30회 행정고시 수석합격의 영예를 안았던 안완기(安完基·36)씨는 최근 말을 갈아 탔다. 12년간 근무한 산업자원부에 사표를 내고 이달 초부터 법무법인 한미로 출근하고 있다.

미국 유학시절 취득한 변호사 자격증과 산자부에 근무하면서 담당했던 다자간 통상 업무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프로젝트 금융’이라는 새로운 영역에 뛰어들어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미국 하버드대 법대 석사 출신의 엘리트 공무원인 그가 공직 생활을 청산한 이유는 ‘우물안 개구리’가 되기 싫었기 때문이다.

안씨는 “한 직종에만 매달려 있으면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할 수 없다”며 “앞으로 공직에서 국장이나 장차관을 하려면 반드시 민간기업 등에서 경험을 쌓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올 5월 정부조직법 개정으로 개방형 임용제가 도입돼 공직 진출입이 비교적 자유로워지면서 안씨의 경우처럼 ‘경력관리’를 위해 민간기업으로 옮기는 30, 40대 엘리트 공무원이 늘고 있다.

종전에는 일단 공직을 그만두면 다시 돌아올 수 없었으나 정부부처 고위직의 일정 부분을 민간에 개방하는 이 제도가 도입되면서 민간 기업에서 경력을 쌓고 돈도 번 뒤 다시 공무원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특히 개방형 직위를 점차 확대하겠다는 정부의 방침에 따라 각종 자격증과 석박사 학위로 무장한 외부의 민간 전문가들에게 자리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에 엘리트 공무원들이 차츰 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다.

예전에는 퇴직을 앞둔 공무원들이 민간기업의 ‘로비스트’로 가는 경우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젊은 공무원들이 업무능력을 평가받아 ‘전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공직에 있을 때보다 2∼5배의 연봉을 받으며 대기업체나 로펌 등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다.

최고의 ‘경제엘리트’가 모여 있다는 재정경제부에서는 올해 사무관급 이상 공무원 23명이 자진 퇴직했다.

또 산자부에서는 국장급 1명과 서기관급 2명이, 기획예산처와 금융감독위원회에서도 각각 1명의 고시출신 과장과 국장이 잇따라 사표를 냈다.

재경부 세제실 서기관으로 근무하다 올 6월 LG전자 수석부장으로 자리를 옮긴 박종호(朴鍾昊·37)씨는 “공직에 계속 있는 것보다는 기업에서 경험을 갖는 것이 경력 관리를 위해 좋을 것 같아 전직했다”며 “기업 현장에서 충분한 실무경험을 쌓은 뒤 기회가 닿는다면 다시 공직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올 4월 재경부 경제분석과(서기관)에서 삼성증권 기획팀장으로 옮긴 이형승(李炯昇·37)씨도 “국제통화기금(IMF)사태를 계기로 민간부문의 역할이 점차 커지는 것 같아 나왔다”며 “민간부문에서 경험을 쌓다 돌아가는 것이 공직을 수행하는 데도 훨씬 효과적일 것”이라고 밝혔다.

법제처 모 사무관(30)은 “개방형 임용제 실시 이후 공직에만 있다가는 민간 전문가들에게 요직을 빼앗길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꼈다”며 “기회가 닿으면 외국에 나가 변호사 자격증을 딴 뒤 로펌에서 경력도 쌓고 돈도 번 뒤 공직에 돌아와 봉사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중앙인사위원회 정하경(鄭夏鏡) 기획총괄과장은 “민간과 공공부문간 인사교류는 상호간 노하우를 공유할 수 있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며 “그러나 공직의 처우수준이 민간기업과 너무 차이가 나기 때문에 밖으로 나간 엘리트 공무원들이 그들의 말처럼 다시 공직으로 돌아올지 모르겠다”고 걱정했다.

〈이진영·이 훈기자〉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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