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주종환/알맹이 빠진 재벌개혁정책

  • 입력 1999년 9월 1일 19시 28분


기업지배구조개선위원회가 최근 발표한 모범규준(초안)은 시종일관 권고사항이라는 형식을 지키면서 의무화를 피했다. 그러나 지난번 상법개정 때 소액주주들의 집중투표제가 도입됐지만 주주총회 결의로 이를 배제할 수 있다는 단서조항을 넣도록 재벌들이 로비를 해 관철시켰다. 지난 봄 정기주주총회 때에는 이를 근거로 거의 모든 재벌회사가 정관에서 집중투표제를 도입하지 않겠다고 결의했다. 이같은 사실을 감안하면 권고만으로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다.

사외이사를 반수이상으로 한다든지, 사외이사만으로 구성된 이사추천위원회와 감사위원회의 설치 등은 진일보한 모양새를 갖추었으나 재벌총수가 사실상 사외이사를 선임하는 실정에 비추어 눈감고 아웅하는 것이다. 재벌그룹 소속 계열사의 상호소유 주식부문에 대해 의결권을 제한해야만 이사진 선출과정에서 재벌총수의 독단을 막을 수 있다. 특정 주주의 의결권을 제한하는 것에 대해서는 주주 동등권의 원칙, 사유재산권과 자본주의 원칙의 침범이라는 비판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주주권의 제한이 공정거래법 등에서 도입된 현실에 비추어 재벌을 옹호하기 위한 논리에 불과하다.

모범규준에서는 주주권의 제한 대상을 재벌기업 소속의 ‘기관투자자’의 주식보유분에 한정시키고 있는데, 주주권의 제한조치는 재벌 소속 기관투자자 뿐만 아니라 재벌 안의 일반 기업과 공익법인으로까지 확대 적용돼야 할 것이다.

좋은 이사와 감사를 선임하는 일은 기업의 사활을 좌우할 정도로 중요한 일이다. 선진국 추세로 보면 이사와 감사의 선임에서 종업원 소비자, 나아가서는 관련기업과 소액주주들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는 장치들을 도입하고 있다. 특히 기업과 경영의 일상적인 내용은 누구보다도 종업원들이 잘 알고 있다. ‘근로자의 참여 및 협력증진에 관한 법률’은 ‘노사협의회’를 의무화하고 있다. 따라서 이사와 감사의 선임과정에 노조 쪽의 의견을 참조할 수 있는 경로를 마련해 주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선진국에서는 노조의 경영참여를 제도적으로 보장해주는 예가 많다. 모범규준 전문에서는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으면서…세계의 흐름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거창한 말을 늘어놓으면서도 막상 내용에서 세계의 흐름에 역행해서야 말이 되는가.

그동안 실정을 보면 지주조합 대표자가 일괄해서 의결권을 행사할 때 지배주주 쪽에 표를 몰아주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 때문에 종업원주식은 사실상 내부지분으로 간주되는 실정이다. 이런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는 종업원 각자가 독자적으로 직접 주주권을 행사하도록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

재벌체질 개혁의 제1단계는 소유구조 개혁보다는 지배구조 개혁으로부터 접근해 들어가는 것이 손쉬운 방법일 것이다. 이번에 발표된 모범규준의 내용은 모양새만 갖추었다는 인상이 짙어 입맛이 씁쓸하다.

주종환(동국대 명예교수·참여연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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