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재벌문제 혼선 해소를

  • 입력 1999년 8월 23일 18시 50분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가 나온 뒤에 재벌개혁을 둘러싸고 빚어진 혼선에 정부는 책임을 느껴야 한다. 김대통령이 “이제는 시장이 재벌구조를 받아들이지 않는 시대”라고 규정한 뒤의 상황은 정부가 시장의 혼란을 부채질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김태동(金泰東) 황태연(黃台淵)씨의 한 술 더 뜬 강성 발언은 ‘재벌해체가 정부의 본심이구나’라고 짐작케 할 소지를 키운 게 사실이다. 청와대측은 이들의 발언이 개인의견이라고 뒤늦게 해명했지만 시장의 의심을 충분히 해소하지는 못했다.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장과 정책기획위원의 말이 미칠 파급을 원려(遠慮)했다면 발언원고가 사전배포된 시점에 확실하게 대응했어야 마땅하다. 이들이 단순히 사인(私人)이라면 누가 그렇게 중요한 정책발언을 청하기나 했겠는가.

정부 경제팀의 정책혼선도 이에 못지않다. 재정경제부는 18일 5대 재벌그룹의 제2금융권 지배를 차단하겠다며 소유지분제한방안을 발표했다. 그래놓고 이틀 뒤엔 이를 사실상 백지화했다. 애당초 시장의 불안만 키울 현실성 없는 내용이었으니 서둘러 철회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하지만 대통령 경축사 후속조치를 취하면서 이런 졸속과 혼선을 드러내니 시장이 정부를 신뢰하겠는가. 엘리트 경제관료라고 자처하는 이들이 금융시장의 복잡한 인과(因果)구조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는 것 같아 조마조마할 정도다. 18일 발표 당일에는 ‘30대재벌 소유 금융기관에 대해서는 그룹명칭을 못쓰게 할 것’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아이디어까지 포함시켰다가 부랴부랴 삭제하는 해프닝을 빚기도 했다. 기업 브랜드가치의 중요성을 간과한 단견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재벌은 마땅히 개혁돼야 한다. 하지만 중구난방의 언치(言治) 인치(人治) 행태 때문에 적잖은 기업들이 갈팡질팡하고 있다. 관치(官治)가 깊어지는 상황에서 정부의 진의를 읽어내기 위해 기업들이 치러야 하는 비용이 결코 적지 않다. 김태동 황태연씨와 경제정책관료들에게 묻고 싶다. 개혁의지를 과시하는 것도 좋지만 뒷감당도 못할 발언과 정책방안을 그렇게 가볍게 쏟아내도 무방한가. 그 말 한마디, 발표 한 줄에 놀라 이리 쏠리고 저리 흔들리는 시장의 혼란을 생각해보았는가. 여러분만이 개혁의 전사(戰士)는 아니다.

정부는 25일 정―재계 간담회에서 재벌개혁안을 교통정리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번에야말로 재벌개혁을 둘러싼 불확실성을 제대로 해소해주기 바란다. 충분한 토론을 통해 재벌들의 분명한 동의를 얻어내고, 윽박지르는 말이 아니라 투명한 원칙에 입각한 제도적 접근으로 개혁을 진전시켜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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