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배인준/칼리 피오리나

  • 입력 1999년 7월 26일 19시 20분


미국 휴렛팩커드(HP)는 IBM에 이은 세계 2위 컴퓨터회사로 연매출이 470억달러(약 56조원)에 이른다. 61년전 실리콘밸리 1호기업으로 출발한 HP는 미국 서부 최고명문인 스탠퍼드대와의 대표적 산학협동 성공사례이기도 하다. 이 거대기업이 12월부터 회사를 이끌 최고경영자(CEO)사장을 공모한 것은 올 봄이었다. 100여명의 내로라하는 외부 전문경영인들이 지원했다. HP 내부에도 걸출한 인재들이 수두룩하다. 그런데도 이들은 ‘새로운 지도력이 필요하다’며 CEO 스카우트에 나섰다.

▽HP는 4개월여의 심사 끝에 19일 루슨트 테크놀러지의 글로벌서비스담당 여성사장 칼리 피오리나(44)를 새 CEO로 낙점했다. 이날 피오리나를 잃게 된 세계적 통신장비회사인 루슨트 주가는 2% 떨어지고 HP 주가는 2% 올랐다. 투자자들이 경영인재의 가치를 기업가치의 핵심요소로 판단하고 있음을 실감케 한다. 전문경영인 사장이 바뀐다고 그 회사 주가가 움직인 사례를 찾기 어려운 우리나라 기업상황과는 사뭇 다르다.

▽미국도 여성에 대한 편견이 온존하는 나라다. 보수적 기업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대학에서 역사 철학 경영학 등을 공부한 피오리나는 ‘부하들의 충성심을 이끌어내는 힘’을 포함해 탁월한 경영능력을 발휘하며 여성의 벽을 허물어왔다. 권력자와의 친분 등 숨은 연(緣)을 발판으로 어느날 갑자기 ‘부적절한’ 자리에 올랐다가 낙마한 한국의 일부 여류와는 역시 다르다. 15년전 사내(社內)결혼한 피오리나의 남편이 1년전부터 아내 대신 가사를 도맡는 ‘주부(主夫)’로 변신한 것도 능력 우선의 선택이라고나 할까.

▽피오리나는 새 일자리가 결정되자 “HP를 유연한 조직으로 만들고 조직에 속도감과 긴장감, 그리고 경쟁의지를 불어넣겠다”고 말문을 열었다. 우리나라 기업들에 더없이 절실한 얘기로 들린다.

배인준<논설위원>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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