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경택칼럼]「묘수」가 「악수」된 이유

  • 입력 1999년 7월 9일 19시 30분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삼성자동차의 출발이 경제적인 문제를 경제적으로 다루지 못한데 오늘의 잘못된 결과를 초래한 원인이 있다고 지적했다. 김영삼(金泳三)정권이 정치논리로 처리했다는 비판이다.

그러나 DJ정부가 삼성차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을 보면 남의 얘기를 할 것만도 아니라는 생각이다.

▼비경제논리적인 말 ▼

우선 삼성이 지난달 30일 삼성자동차 법정관리신청과 함께 이건희(李健熙)회장의 사재인 삼성생명주식 400만주를 출연, 빚을 갚겠다는 ‘묘수’를 서둘러 발표한 과정에 ‘불순’한 것이 끼어 들었다. 즉 김대통령의 방미(訪美)출국(7월2일)전에 한 건 올리려고 서두른 것이다. 이 발표는 이헌재(李憲宰)금감위원장 등 정부측과 협의끝에 나온 것임은 물론이다.

그러다 보니 삼성생명 주식을 상장할 경우 당연히 일어날 수밖에 없는 특혜시비에 대한 충분한 해결책을 내놓을 수 없었다. 이래서 정부나 삼성의 입장에서는 현실적으로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 ‘묘수’가 ‘악수’(惡手)가 돼버리고 삼성차문제 는표류하기 시작했다는 게 삼성관계자의 고백이다.

관료들의 실적주의 때문에 일을 그르친 것은 또 있다. 제일은행 매각협상이다. 이것도 정부관계자가 ‘대통령출국전 마무리’를 언론에 흘려놓는 바람에 우리측은 쫓기게 됐고 상대방은 느긋해져 결국 우리가 불리한 조건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이런 것들보다 더 문제를 어렵게 하는 것은 정부당국자들이 던지는 비경제논리적인 ‘말’이다. 정부고위관계자는 지난 2일 “삼성차 부산공장은 현재대로 계속 가동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공장의 정상가동대책을 마련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현재대로 계속 가동’이란 말은 삼성차 SM5를 계속 생산한다는 얘긴데, 이 공장에서 SM5를 생산하느냐 여부는 삼성차처리문제의 핵심사안중 하나이다. 정부당국자의 말 한마디로 주요한 한 항목이 고정돼버리면 이 일을 처리하는 사람은 운신의 폭이 그만큼 좁아질 수밖에 없다. 심하면 일 처리의 방향이 완전히 잘못될 수도 있다.

사실 삼성측이 법정관리신청을 발표한 날 이헌재금감원장은 “삼성차는 법정관리 후 청산으로 가는 것”이라고 했다.

빅딜의 목적이 과잉―중복투자 과잉시설을 정리하고 생산성과 경쟁력을 높이는데 있다면 부산삼성차공장의 계속 가동은 이 목적과 상치되는 것은 아닌지를 우선 따져봐야 한다.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연구원들도 부산공장은 시장경제원리에 따라 청산돼야한다면서 부지는 아파트단지 등 다른 생산적인 용도로 전용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제안했다.

이 공장은 돌릴수록 손해만 늘어난다는 게 업계전문가들의 얘긴데, 그렇다면 ‘계속 가동’을 강조하는 것은 안맞는 말이다.

▼사회적 손실 누가 보상▼

말이 맞고 안맞고 간에 삼성차공장문제는 법정관리를 해나가면서 수익성등을 검토하여 처리방안을 결정할 사항이다.

김대통령이 미국 캐나다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후 정부의 삼성차해결원칙은 결자해지(結者解之)였다. 그러면서 삼성차처리문제로 인한 ‘부산시민, 협력업체, 종업원의 피해는 없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됐다. 이 말의 바닥에는 다분히 정치논리가 깔려있다.

부산민심을 잡기 위해서는 이런 얘기가 나올 수밖에 없겠으나 삼성차를 큰 구도속에서 정리할 경우 협력업체나 종업원의 피해가 어떤 형태로든 불가피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김종필총리도 국회답변에서 삼성차가 제삼자에게 인수돼도 부산공장은 ‘현행대로’ 가동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부산사람들 듣기좋은 말을 했다.

여하튼 삼성차처리문제는 일주일여동안의 표류끝에 원점으로 돌아와 결국 삼성생명의 상장 허용과 삼성의 추가출연, 부산지역경제 활성화방안 구체화 등으로 가닥을 잡은듯하다.

그러나 불과 1주일동안 정부 관계자들의 말 바꾸기, 정책방향의 혼선, 정치인들의 지역감정부추기기가 가져온 유형 무형의 사회적 손실을 누가 보상할 것인가.

일개 기업의 문제를 놓고 관계장관회의를 몇번씩 하고서야 겨우 가닥을 잡을 정도라면 이 정부의 관리능력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지 않는가. 이런 실력으로 어떻게 21세기를 맞겠는가.

어경택〈논설실장〉euhkt@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