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걸 스탠더드11]의료사고 「법의 메스」 예리해진다

  • 입력 1999년 6월 24일 19시 24분


미국 여류 사진작가인 조앤 모티카는 한쪽 유방을 절제한 자신의 모습을 찍어 ‘풍만한 가슴’이 여성미의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해 유방을 잃은 여성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미국에서 모티카는 ‘유방 없는 사진’보다는 의료소송의 주인공으로 더 유명하다.

그는 오른쪽 가슴에서 악성 종양이 나타나자 의사의 권고에 따라 한쪽 유방을 절제했다. 그러나 나중에 자신의 종양이 심각하지 않은 상태로 유방을 절제하지 않아도 치료할 수 있었음을 알게 됐다. 담당 의사를 상대로 소를 제기한 그는 금년 소송에서 이겨 220만달러를 받아냈다.

미국 병원과 의사들은 환자를 진찰하고 치료할 때 언제라도 의료소송를 당하리라는 예상을 하고 대비할 만큼 의료소송이 급증하고 있다. 79년 전체 의사의 3%가 경험하던 의료분쟁이 83년 8%로 늘어났다. 95년 전체 의사의 0.57%인 3963명이 의료사고를 이유로 면허정지 처분을 받았다.

손해배상 규모도 커졌다. 96년 미국에서 의료사고로 지출한 배상금이 지출된 건수는 총 1만9927건, 평균 배상금액은 18만3126달러에 이른다. 94년 병원은 환자의 부당한 죽음에 대해 평균 47만320달러, 의사는 57만9000달러를 지급했다. 병원의 의료사고 패소율은 45%에 이른다.

이같은 소송 러시가 의료비 부담을 늘리고 의사들의 진료 기피를 초래해 심각한 사회문제로 되고 있지만 환자들의 권익 찾기 움직임에 따라 의사들의 진료행위가 심판대에 오르는 것은 세계적 추세다.

93년 미국 보스턴 셀틱스 농구팀의 간판 선수 레기 루이스는 슛연습 도중 갑자기 쓰러져 사망했다. 루이스의 부인 도나 해리스는 남편이 사망한 지 6년이 지난 올 5월 루이스를 진찰한 의료진을 상대로 의료과실 소송을 제기했다.

도나는 “남편이 치명적인 심장박동 질환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의료진이 이를 단순한 신경성 질환으로 진단하고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 농구선수로 복귀할 수 있다고 말했다”며 남편은 이 말만 믿고 슛연습을 하다가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루이스 선수를 진료했던의료진은 “그가 코카인을 사용한 사실을 의료진에게 숨겨 정확한 진찰이 불가능했다”고 반박한다.

이 사건은 아직 판결이 나오지 않았지만 루이스 선수 가족이 승소하면 의료진은 루이스의 수입에 해당하는 4000만∼1억달러에 이르는 손해배상을 해야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사건은 이른바 ‘의료 과오’와 ‘문진시 환자의 협조 의무’가 맞붙은 상징적인 사건이다.

한국에서도 의사나 병원을 상대로 한 소송이 급증하고 있다. 작년 한해 동안 법원에 접수된 의료관련 소송은 무려 399건. 보건복지부는 대한의사협회 공제회 신고건수를 기초로 의사와 환자가 합의하거나 드러나지 않은 분쟁까지 합하면 의료분쟁은 연간 1만건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판결의 주요 흐름도 ‘의사 보호’에서 ‘환자 보호’로 이동하면서 환자측 승소율이 60∼70%에 이른다. 의사가 소송에 졌을 때 승소한 환자측에 지급하는 배상금도 95년 기준으로 평균 8350만원.

손바닥과 발바닥에 땀이 많이 나는 다한증 환자 A씨는 다한증을 치료하기 위해 제1,2흉추 안쪽에서 손으로 가는 교감신경절제수술을 받다가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뒤 17일만에 사망했다.

대법원은 95년 2월 이 사건에 대해 ‘의료행위는 고도의 전문적 지식을 필요로 하고 환자가 의료행위를 완벽히 입증한다는 것은 어려운 만큼 의료상 과실과 결과 사이의 인과관계를 추정할 수 있도록 과실 입증 책임을 완화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의료 문외한인 환자측의 입증책임을 완화한 대법원 판례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최근 의료소송에서 의사들을 옭아매는 쟁점은 의사의 설명의무 위반이다. 설명의무 위반에 걸린 의사는 백전백패한다.

미국 병원에서는 번거로울 정도로 의료 행위의 단계마다 각종 부작용이나 예상되는 위험성을 기재한 서류를 환자와 가족에게 제시하고 서명을 받은 뒤 치료를 시작한다.

89년 경기 광명시에 살던 B씨는 K병원 산부인과에서 임신 29주만에 사내아이를 출산했다. 몸무게 1.3㎏으로 체중미달인 이 아기는 병원의 권유에 따라 인큐베이터에 들어가 산소를 공급 받았다. 그러나 퇴원후 아기는 미숙아망막증에 걸려 양쪽 눈 모두 실명했다. 93년2월 법원은 병원이 미숙아의 망막이 산소에 닿으면 좋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환자 부모에 설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손해배상금 30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최근 ‘보건의료법 의료분쟁’이라는 책을 펴낸 한국보건의료법연구회 정용진(丁容鎭) 연구위원은 “의료사고에서 의료행위와 결과에 대한 인과관계를 입증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전에 의사가 환자에게 질병의 종류와 치료방법의 위험성, 예상되는 결과를 충분히 설명했느냐를 판결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의사의 사전설명에 대한 환자의 동의가 있을 때만 적법한 의료행위로 규정하는 것이 세계적 추세다.

의사가 진료에 전념하고 환자가 권리를 충분히 구제받기 위해서는 한국에서도 제도 개선이 시급한 실정이다. 법무법인 태평양 나승복(羅勝福)변호사는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중과실이 있는 의사나 병원에 엄청난 금액의 징벌적 배상을 하는 예가 많다”며 “국가 차원의 중립적인 감정기구의 설립과 국가가 보험료 일부를 부담하는 의사배상책임보험제도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성희기자〉shchu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