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밀레니엄D-194]세계사 바꾼 대사건

  • 입력 1999년 6월 20일 20시 58분


1969년 미국 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이 달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TV를 보던 세계 6억 인구는 열광했다. 그 때 암스트롱이 남몰래 지니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것은 66년전 라이트형제의 ‘플라이어’호 천조각이었다. 달나라 왕복 8억m를 여행하는 데는 60여년이 걸렸지만 라이트형제가 36m의 첫 비행을 하기 위해 인류는 수천년을 기다려야 했다.

행운은 아주 우연히 다가왔다. 1878년 아버지 밀턴 라이트는 출장길에 열한살인 윌버와 일곱살인 오빌 형제에게 깜짝 놀랄 만한 선물을 들고 왔다.

장난감 헬리콥터였다. 대나무와 종이로 만들어진 그 헬리콥터는 감긴 고무밴드가 풀리며 프로펠러를 돌려 하늘을 나는 장난감이었다. 형제는 장난감에 매혹됐다. 헬리콥터가 부서질 때까지 갖고 놀았으며 장난감이 부서지면 새로 만들기를 거듭했다.

두번째 ‘사건’은 1896년에 일어났다. 장티푸스에 걸린 오빌을 간호하던 윌버는 신문에서 한 글라이더 비행사의 극적인 죽음을 읽었다. 2000개 이상의 글라이더를 만들어 타다 사고로 죽은 독일인 오토 릴리엔탈의 마지막 말은 “희생은 있기 마련이다”였다. “그래 어떤 희생을 치르건 날고야 말겠어….” 형제는 다짐했다.

윌버는 닥치는 대로 ‘나는 기계’에 대한 자료를 찾았다. 당시 기계의 힘으로 하늘을 나는 꿈을 키우며 비행기를 만들던 사람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많은 문제들이 해결됐지만 한가지 해결되지 못한 것이 있었다. 공중에서 비행기를 조종해 균형을 유지하는 문제였다.

어느날 윌버는 흰머리수리를 보았다. 자유자재로 하늘을 나는 흰머리수리가 한쪽 날개를 위로 치켜올리며 다른 쪽 날개는 밑으로 내려 방향을 바꾸는 것을 보고 윌버의 머릿속엔 번개처럼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을 어떻게 기계에 적용할 것인가.

며칠후 자신이 운영하는 자전거포에서 손님과 잡담을 하던 윌버는 무심코 자전거 튜브를 싸고 있던 종이박스의 한끝을 비틀었다. 문득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 윌버는 해답을 발견했다. ‘도르래를 이용해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줄을 날개에 붙이면 한쪽 날개를 올릴 때 다른 쪽 날개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라이트형제의 생업이 자전거포였다는 것은 비행기 발명에 중요한 ‘우연’이었다. 사업이 꽤 잘돼 비행기 실험에 드는 비용을 감당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비행기 제작에 필요한 도구들을 조달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미국인들은 만약 기계의 힘으로 하늘을 날게 된다면 그 주인공은 새뮤얼 랭글리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스미소니언협회장이었던 그는 미군으로부터 7만달러를 지원받아 포토맥강에서 실험을 했다. 그러나 비행기는 강에 처박히고 비행사 찰스 맨리는 간신히 구조되자 뉴욕타임스지는 이렇게 비꼬았다. “아마 100만년이나 1000만년 뒤에는 하늘을 날려는 인간의 꿈이 실현될 것이다”라고. 그러나 그로부터 9일후 라이트형제는 자전거포에서 번 돈 1000달러를 들여 비행에 성공했다.

만일 라이트형제가 아니었다면 인간은 그렇게 빨리 비행기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유복한 자전거포 주인에 만족했다면, 그리고 형제중 한사람이라도 없었다면 비행기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비행기의 기본 원리를 구상한 뒤에도 1000번 이상의 글라이더 실험을 한 후에야 비행기 제작에 착수할 만큼 치밀했다. 그러고도 7년간 수많은 실패와 도전을 거듭했다.

1903년 12월 17일 미국 남동부의 킬데블 언덕. 드디어 대서양의 거센 바람에 실려 ‘플라이어’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12초간 36m의 비행이었다. 이 광경을 본 사람은 두 형제와 시골의 인명구조대원 5명 뿐. 그러나 그것은 수천년 인류의 꿈이었던 하늘로의 비상이 실현된 순간이었다. 인간은 처음으로 동력을 갖추고, 조종 가능한 ‘비행기’를 갖게 된 것이다. 만일 1878년 어느날 밀턴이 형제에게 장난감 헬리콥터를 선물하지 않았더라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킬데블〓신연수기자〉ysshin@donga.com

▼라이트형제는 누구인가?▼

나중에 사람들은 비행기를 발명한 형제가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쟁쟁한 박사와 모험가들이 언론에 등장했지만 정작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시골의 자전거포 주인들이었다.

윌버 라이트(1867∼1912)와 오빌 라이트(1871∼1948)는 목사인 밀턴과 수전의 5남매중 셋째와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윌버는 차분하고 세심한 성격이었고 오빌은 사업적 수완이 뛰어나고 활달한 편이었지만 두사람은 어릴 때부터 잘 맞았다. 두사람은 술 담배를 하지 않았고 평생 결혼도 하지 않았다. 가장 큰 공통점은 어릴 때부터 기계에 관심이 많고 기술적 재능이 뛰어났다는 것. 그들은 자전거를 판매하다가 곧 수리와 제작까지 했다. 남는 시간에는 카메라에 몰두하거나 인쇄기 난로 같은 것을 만들었다.

두사람 다 고등학교를 중퇴했기 때문에 체계적인 과학 교육이나 기술 훈련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보다 뛰어난 과학자였고 기술자였다. 형제는 각종 실험과 설계 제작 과정을 낱낱이 일지 형식으로 기록했다. 그 일지들은 미국 의회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그들은 1000번 이상의 글라이더 실험을 통해 공기압력과 날개의 관계를 연구해 도표화했고 효율적인 프로펠러 제작을 위한 공식도 만들었다. 바람의 압력을 실험하기 위해 만든 ‘윈드터널’은 지금도 비행기성능 개선을 위해 사용된다. 글라이더와 비행기, 그 부품들을 만들 때는 세밀한 드로잉과 설계후에 만들었다.

1908년 대중앞에서 시범비행을 한 후 공식 인정을 받은 형제는 데이턴에 ‘라이트플라이어회사’를 만들어 계속 비행기를 생산하고 개선했다. 형의 자손들이 미국에 살고 있으며 회사도 계속 운영되고 있다.

미국의 한 평론가는 그들의 비행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에 비유했다.

그러나 후세 사람들은 우연을 필연으로 만든 형제의 집념과 창의성에서 인간 내부의 신대륙을 발견했다.

▼나는 꿈 첫 실현 어촌 「킬데블」부유층 휴양지됐다▼

새처럼 날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처음 실현된 곳. 미국 남동부 노스캐롤라이나주 아우터뱅크의 킬데블 마을. 인간에게 하늘을 열지 않았던 신은 이곳에서 죽임을 당했다(Kill Devil).

라이트형제는 1900년 처음 이 곳을 찾아왔다. 바람과 모래, 하늘을 향한 꿈을 좇아. 비행기를 하늘로 띄우기 위해서는 거센 바람이 필요했고 연착륙을 할 넓은 모래밭이 필요했다. 형제는 미국 기상청에 물어 생전 처음 듣는 ‘키티호크’라는 마을을 알아냈다. 미국 북부 오하이오주 데이턴에서 기차와 배를 타고 부품들을 날라 조립하는 멀고 험한 여행이었다. 그들은 모래바람이 앞을 가리는 벌판에 천막을 치고 살면서 비행기 실험을 했다.

이제 킬데블에 모래밭은 없다. 미국 정부가 형제를 기념하기 위해 잔디를 심고 기념탑과 기념관을 세웠기 때문이다. 라이트형제는 키티호크라는 지명을 찾아왔지만 이제 그들이 살던 킬데블에도 마을이 생겼다.당시에는 풍상에 젖은 오두막집 몇 채만 있던 작은 어촌이었지만 지금은 미국 부자들의 별장이 즐비한 이름난 휴양지가 되었다. 형제가 작업장과 생활공간으로 썼던 두개의 캠프는 새로 세워졌고 세계 최초로 비행기가 날아올라 연착륙한 지점에는 각각 표석이 세워졌다. 53m를 난 그날의 두번째 비행, 60m를 난 세번째 비행도 표석을 세워 기념하고 있다. 플라이어1호는 워싱턴DC의 스미소니언 국립항공우주박물관에, 형제의 자전거포 건물은 고향인 오하이오주 데이턴에 보존돼 있다.

2003년 12월이면 라이트형제가 첫 비행을 한 지 100주년이 된다.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는 기념사업회가 구성돼 새로운 항공박물관을 건립하고 에어쇼 등 특별행사를 벌일 계획을 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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