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66)

  • 입력 1999년 3월 17일 18시 36분


읍내는 무싯날이었지만 제법 사람들이 많았어요. 공일이니까 인근 면에서 나처럼 직장을 가진 이들이 볼일을 보러 나오고 또 교회도 다녀야 하니까. 규모가 좀 큰 어느 군이나 그렇지만 공설 시장이 있죠. 그 부근에는 오일 장을 위해서 노점을 위한 공터나 기둥만 있는 간이 점포를 마련해 두기도 하지요. 시골 시장이지만 있을 건 다 있어요. 철물점도 있고, 온갖 부엌 물건을 파는 그릇점도 있구요, 포목점도 있고, 문방구, 전파상, 잡화 만물점, 빵집, 떡집, 과자 가게, 솜틀집, 이발소, 미장원, 영화관도, 목욕탕도 있고, 뭐 다 있어요. 우리는 서로 작별의 손짓을 하면서 남탕 여탕쪽의 문을 열고 목욕탕에 들어갔지요. 내가 시간을 더 잡아먹는 동안 당신은 모처럼 이발도 했구요. 장은 봐야 하는데 어찌나 허기가 지던지. 우리는 물건을 잔뜩 사서 양 손에 들고 시장 모퉁이에서 두리번 거렸어요. 당신은 신기한 듯 돌아나온 시장을 다시 한번 바라보고는 말했어요.

우리 장날마다 나오자!

나 학교는 어떡하구.

그건 참 아쉬운데….

나 대신 현우씨가 내 몫까지 구경 나오면 될 거 아녜요.

혼자서 무슨 재미로. 하여튼 장은 좋아.

우리는 무슨 옛날 얘기에 나오는 주막처럼 생긴 국수 집에 들어갔지요. 나무 탁자와 오리의자 몇 개가 있고 아줌마가 말없이 국수를 한움큼씩 집어서 대바구니에 담아 장국에 말아 냈지요. 네모나게 썬 무와 어른 손가락만한 멸치를 푹 끓여서 국물 내고 나중에 호박무침을 고명으로 얹고 파와 고춧가루를 뿌려 주는, 시골 새참 같은 국수 말예요. 내걸 더 덜어 주었는데두 당신은 국물까지 싹 비웠죠.

어릴 때 엄마 따라서 시장에 가면 나는 가끔 도둑질을 했다?

당신이 그렇게 말을 했지만 나는 무슨 소린지 알아듣지 못했어요.

건어물전이나 과일전을 지나면서 멸치 몇 마리, 아니면 오징어포 몇 오라기, 포도알이나 딸기 두어 알을 슬쩍 집었지. 그게 얼마나 재밌는데.

그건 나두 했어.

우리는 읍내 마실을 다녀가는 사람들로 가득찬 버스에 짐을 들고 타기도 뭣하고 남의 눈에 띄기도 꺼려져서 하는 수 없이 택시를 탔어요. 아, 차창으로 불어드는 바람 속에 막 싹이 터서 오르기 시작한 여린 봄 풀들의 냄새가 풍겨 왔지요. 사람의 마을에는 이런 싱그러운 생명의 짓거리와 바람이 어울려 춤을 추지요. 우리는 그 때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만 같았어요.

집에 돌아와 살림을 정돈하며 당신은 아랫집에서 물을 길어 오고 나는 그릇들을 씻었어요. 물지게가 없어서 그냥 양동이 두 개를 들고 가서 두 손에 들고 뒤뚱거리며 올라왔죠. 천천히 쉬어가며 올라오래도 당신의 걸음은 항상 급해서 물이 철철 넘치고 바지 가랑이가 다 젖었잖아요. 당신두 참, 맛있는 게 많은데 무슨 덴뿌라인지 어묵인지를 간간하게 볶은 걸 좋아했지요. 내가 집이 읍내 근처인 학교 동료 여교사들에게서 밑반찬을 얻어 오겠다고 했더니 당신이 그랬지요.

나는 정착민이 아닌 떠돌이라 그저 도시락 반찬 따위가 입에 맞아.

우리들의 그 초라하고 따뜻한 밥상이 생각나요. 아랫집에서 전기를 끌어와 형광등은 달지못하고 육십촉짜리 전구를 소켓에 끼우고 불을 켜니까 우리 집은 당신 말마따나 에디슨 연구소처럼 밝아졌어요.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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