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59)

  • 입력 1999년 3월 9일 19시 05분


너의 길을 걸어라, 그리고 타인들이 말하게 내버려 두어라!

이 말 가운데는 세계를 변화 시키겠다는 신념과 그에 반비례한 외로움이 반영되어 있다. 더구나 남들이 쉴새없이 지껄이는 소음으로부터도 자유롭지 않다. 하이드파크의 논설가들에 귀를 기울여 보기도 하고 도서관을 오가며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렸던 고집쟁이의 망명자. 뒤에 러시아인 대머리 아저씨가 같은 공간을 왕복했다.

그러나 수많은 불운한 변혁가들은 사나운 발 밑에 개미가 으깨지듯이 아무런 사연도 없이 말살 되곤 하였다. 그런데 기묘하기도 해라. 으깨진 자들은 형체도 잔해도 기억조차 남지 않았는데 짓누른 쪽은 오히려 영원히 용서하지 않고 죽은 자들과 그 비슷한 생각들까지 몸서리치게 증오한다. 자책 때문일까. 그는 자신을 두려워 하는 거야. 이러한 집착은 가해의 정도가 깊을수록 더욱 오래 간다.

그이의 엽서 가운데서 ‘여기를 집으로 삼아야 하겠다’던 말이 나의 뇌리에 오래 남았다. 그에게는 시간이 정지되어 있다. 장기수의 독방이 죽음이나 같은데도 그는 누군가의 낙서를 옮겨 놓았어. 존재하는 것은 행복하다고? 카프카와 르네 마르그리트를 동시에 생각한다. 글로 쓴 자에게 생은 백일몽과도 같은 낯선 꿈이라면, 그림쟁이에게는 냉엄한 물질이 보여주는 환멸이다. 방 안에 놓인 사람이 만든 물건들의 저 무심함을 보아. 존재라니….

이제부터 그와 나는 안과 밖에서 살아갈 거야. 정말 안과 밖인가. 아니면 내가 안이고 그가 밖인가. 이 기록은 나의 기록이며 내 인생에 관한 흔적들이 될거야. 그에게는 저 작은 방 안에 자기의 몫이 따로 있을테지만. 먼 뒷날에 우리의 긴 이별이 끝날 때, 우리는 자신의 시대를 어떻게 해석하게 될까.

나는 언젠가 당신이 해준 귀신 이야기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당신은 밤에 나란히 누워서 어둠 속에서 그 얘기를 해주었는데 이상하게 별로 무서운 생각은 들지 않았지요. 슬픔 비슷한 느낌이 울컥 치솟더니 나중에는 가슴 속이 따뜻해졌지요. 책에서 읽은 걸 옮겨 적듯이 당신의 목소리로 남겨 두려고 해요.

내가 제대하던 해였어. 공부를 좀 해보려고 후배들에게 적당한 절을 좀 구해 달라구 그랬더니 ㄷ읍에 괜찮은 절집이 있다는 게야. 그곳이라면 도시에서도 멀지않고 큰 산자락 근처여서 건강을 회복하고 집중해서 공부하기에두 좋겠다구 생각했지. 그래서 아주 맘을 먹구 세 발짜리 딸딸이에 책상 걸상 그리고 이부자리에 적지않은 책도 싣고는 당장 ㄷ읍으로 갔지.

거긴 강두 있구, 아름다운 산이며 대 숲이 좋다잖아요.

그랬어. 위치가 참 좋은 데 있더군. 읍내 뒤로 하얀 모래밭과 강의 상류인 너른 개천이 흐르는데 읍내 중심 대로가 끝나는 즈음에 다리가 걸렸더라. 아마 새마을 사업으루 놓은 다리겠지. 시멘트 난간이 새하얗게 반질거리던데. 전에는 징검다리가 있었대. 그 다리 앞에 한 백미터쯤 되는 언덕이 보였어. 나중에 올라가 보니 읍내와 개천이 멀리까지 한 눈에 보이더라구. 하여튼 다리를 건너 언덕으로 올라가는데 호국사(護國寺)라구 쓴 작은 팻말이 길가에 보이더군. 일주문도 없는 작은 절이지. 헌데 절 이름이 아무래두 좀 어색하잖아.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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