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37)

  • 입력 1999년 2월 10일 18시 59분


먼 세상을 지나 여기 다시 돌아왔지만 갈뫼는 사라졌다. 집을 고치기로 작정하다. 선반 위에서 나의 옛 편지를 발견하고 오랫동안 다시 읽었다. 유치하고 꿈도 많기도 해라. 아궁이에 쑤셔 넣으려다가 다시 간직하기로 한다. 그들 두 젊은 남녀는 불다 지나간 계절풍처럼 오늘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렇듯 상반된 정신이 있을 수가. 보슈와 브뤼겔의 화첩을 하루종일 들추어 보다. 보슈의 절망적인 지옥의 악몽과 브뤼겔이 그린 생활하는 자의 당당한 실경(實景)은 같은 몸뚱이의 앞과 뒤이다. 밭 가는 농부와 소와 대지로 가득찬 화면의 왼편 구석 위에 한 뼘 쯤의 바다가 조금 보이고 그 안에 보일락말락 사람이 거꾸로 빠진 것 같은 두 다리가 보인다. 그래 놓고 ‘이카러스의 추락’이라니. 양초 날개를 달고 너무 높이 올라갔던 이상의 추락은 이렇듯 생활 앞에 볼품도 없다.

시인이 놓았던 마당의 징검돌을 한 발자국씩 딛으며 돌아다녀 보다가 제자리에 서서 돌 하나를 뒤집어 보기로 하다. 징그럽고 오묘하기도 하여라. 지렁이가 세 마리, 쥐며느리는 와글와글, 푸른 이끼도 몇 점, 돌 틈서리로 억지로 솟아나와 있던 제비꽃의 흰 뿌리가 그 축축한 땅 밑에 깊숙이 박혀 있는 것도 보인다. 나는 이 작은 우주를 건드려 놓은 걸 후회했다. 돌을 다시 제자리에 고스란히 비뚤어지지 않게 조심해서 놓으며 세상에 대하여 잠시 생각했다.

그림, 까짓게 뭐야. 다시 그리나 봐라. 부질없는 무수한 실수. 한자 말은 재미있어, 손을 잃은 흔적이라니. 오늘부터 다시 그에게 옛적의 편지에 이어서 쓰다.

나는 윤희의 스케치북을 접어 놓고 방 청소를 끝내 버린다. 아무래도 방에 불을 넣을 생각이 나서 쪽마루로 해서 아궁이쪽으로 나갔다. 아궁이에 우선 잔솔가지를 겹쳐 넣고 라이터로 불을 살렸다. 작은 짐승처럼 꼬물거리며 살아난 불꽃이 화르르 위쪽으로 붙어 올라갔다. 나는 좀 더 굵다란 나뭇가지들을 꺾어서 서로 엇갈리게 위에 얹고는 장작 두어 개를 그 위에 걸쳐 두었다. 마른 것들이라 별로 연기도 내지않고 불이 붙어 올랐다. 장작을 몇 개 더 얹는다. 곧 번진 불길이 아궁이에 환하게 차오르고 따스한 온기가 쭈그리고 앉은 내 사타구니로 번져왔다. 나는 불꽃을 무심하게 들여다 보았다. 불꽃 머리는 살아있는 생물의 혀처럼 널름거리며 아궁이 주변을 핥고 부넘이를 넘나들었다.

처음 여기 오던 날 윤희는 돌아가지 않았고 나와 함께 이 아궁이 앞에서 불을 땠다. 서로 불을 때겠다고 우기다가 결국은 같이 불을 살리기로 결정을 했다. 불 때는 일이 얼마나 재미있는줄 아느냐고 그걸 누가 모르냐고 하다가 매운 생솔가지 연기 때문에 기침하고 눈물 흘리고. 그러다가 연기 냄새와 어둠 속의 불빛 때문에 아늑해져서 몸이 서로 가까워지고.

그때에는 전기도 없어서 양초 하나로 방을 밝혔다. 그 집을 쓰게 된지 한 달이 넘어서야 본채에서 전기를 끌어다가 형광등을 달았는데 우리는 촛불이 더 좋았다고 서로 이야기 하곤 했다. 주인 집에서 얻어온 밍크 담요 두 장으로 밤을 지냈는데 구들이 절절 끓어서 더울 지경이었다. 우리는 담요 한 장씩을 차지하고 일정한 간격을 두어 방의 벽 이쪽과 저쪽으로 떨어져서 잤다.

아궁이에 군불을 넣고 다시 들어와 방 걸레질을 끝내고나니까 해가 이미 기울어서 바깥이 어둑신해져 있었다. 형광등 불빛에 창호지는 훨씬 하얗게 되고 유리 창경은 까맣게 변했다.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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