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24)

  • 입력 1999년 1월 27일 19시 07분


그는 원칙의 사내다. 하도 좁쌀 같이 따져서 자신의 손이 아니면 남의 손을 거친 일은 잘 믿지 않았다. 봉한은 피아의 구분이 칼처럼 분명해서 박덕하다는 원망도 많이 들었지. 그의 인생은 팔십년의 광주에 완전히 잡혀 있었다. 학살의 중반에 일찍 서울로 도피했고 두 해 동안을 골방에 숨어 지내다가 밀항선을 탔다.

시 쓰던 광원이 형이 우연히 도피 시절에 그를 만났고 그 바람에 작은 학습회를 만들었다가 간첩단이 되어 버렸다. 광원이 형도 오년을 살고 나와 시난고난한 삶을 꾸려 가더니 남수처럼 암으로 죽고 말았다. 나는 봉한을 반쯤 좋아하고 나머지 반쯤은 지겨워 했다. 일제시대처럼 직업 혁명가가 되었더라면 좋았을텐데 오래 살아남게 된 게 다행이면서 결국은 그의 전설을 끝냈다.

그는 십년동안 이국 땅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유럽과 미국에서 성실한 청년 조직을 만들어냈지. 나는 저 안에 갇혀서도 그의 소식을 간간이 듣고 있었다. 그는 스크루를 떼어내고 해안가에 정박한 휴선(休船)이 되었는지도 몰라. 그렇지만 사람 하나 생을 바쳐 할 수 있는 일이 얼마큼이나 될까. 이런 노래의 한 구절도 기억이 난다.

나는 추억 속에

내 힘이 있음을 알고 있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바람에 조금씩 부서져 나가는 흙메처럼 모양이 달라지면서 우리가 하려고 애썼던 일들은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르게 세상에 흔적을 남긴다. 그게 대지와 사람의 역사다. 하지만 어떠하리. 알 수 없는 날들이 저렇게 많이 남아 있는데.

이놈으 반데는 걸레쪽이 다 되아부렀소.

그가 반기며 인사를 하자마자 처음 내뱉은 말이 그랬다.

잘됐지 뭐냐. 이제 이 도시도 일상으로 돌아간 거야.

세상의 모든 불은 드디어 꺼진다. 재가 남고 몇 가지 건질 알맹이도 있고 대부분은 바람에 불려 날아가 버린다.

건강은 어떻소?

괜찮겠지 뭐. 넌 어떠니?

몸이 안좋아요. 옛날에 앓은 폐가 다시 말썽이오. 단전호흡 열심히 하고 있소.

먹구 사는 건….

이럭저럭 해결이 됩디다. 내 언제 밥 걱정 하는 거 봤소. 형님도 어디 가서 몇 달 푹 쉬며 생각도 정리하고 그래야 될텐디.

너 스님 얘기 아니? 남들 살림하는 모양 보구 부러워서 산을 내려 왔더란다. 참한 샥씨 만나서 자식 낳고 석 삼년을 살아 보는데 양식 구해야지, 옷 입혀야지, 초가삼간 마련해야지, 또 팔 건 얼마나 많고 살 건 얼마나 많겠냐. 산더미 같지. 그래 뼈 빠지게 일하며 고생 고생을 하다보니 절 생각이 간절해서 새벽에 도망을 쳤다더라. 도망을 가면서도 진저리를 치면서 아이구 저놈에 살림 쫓아올라, 그러면서 뒤를 돌아 보더래.

그러는 형님은 어쩔 거요?

글쎄 일거리를 찾아야겠지. 아니면 스님이 되든가.

건이 얘기 안합디까?

무슨 얘기.

건이 안 사람 죽었어요.

왜 어디 아펐나?

봉한은 말을 아끼려는지 창문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거리를 내다보았다.

교통사고요.

저런….

실성해서 뛰어들었대요.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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