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자노트]고미석/시누이도 소매를 걷어라

  • 입력 1998년 10월 2일 18시 11분


‘처음엔 잘 느껴지지 않다가 서서히 피부로 느낀다. 발뻗고 자기 힘들어진다. 방심하는 사이에 찾아온다. 누구나 빨리 벗어나길 바란다.’

전철에서 무심코 광고판을 훑어보다 피식 웃었다. ‘IMF와 무좀의 공통점 몇 가지’라는 약광고가 눈길을 끌었기 때문. ‘누구나 빨리 벗어나길 바라는’ IMF시대에 맞는 한가위. 사람들은 마냥 즐거울 수 없다. 특히 올해도 변함없이 명절 뒤치다꺼리를 떠맡아야 할 주부들 마음도 가볍진 않다.

언젠가 한 조사에서 ‘일년 중 남편이 제일 미울 때가 언제인가’라는 질문에 대다수가 ‘명절’이라고 대답했다던가. 집안 남자들끼리 모여 소리 높여 웃고 떠들 때 여자들은 동동거리며 상차리고 치우고를 반복하는 풍경. 한데 자세히 보면 남자 대 여자의 차별만 있지 않다. 딸과 며느리 사이에도 또 다른 벽이 가로막고 있다.

한 주부는 명절 후유증이 매우 심각하다고 호소한다. 외며느리인 그는 시댁과 친정이 같은 서울에 있는데도 결혼 10년 동안 명절 연휴에 친정에 한번도 얼굴을 못 비쳤다. 각자 시댁에서 차례를 지내고 다음날 한꺼번에 몰려드는 시누이들의 수발을 들어야 하는 것이다. 시댁에서 고생한 것을 벌충이라도 하겠다는 듯 시누이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그를 부려먹는다. “밥상 차려라.” “아이들 간식 챙겨라.” 일이 고된 것보다 같은 여자 입장에서 어찌 한 마디 이해나 배려가 없는지, 그게 제일 속상하다고.

전통은 하루 아침에 바꾸기 어렵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힘든 일을 떠안기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면, 먼저 세상의 모든 딸들이 나서야 하지 않을까. 내 형제와 부모의 생각을 바꾸고 나부터 달라지도록.

딸은 며느리가 되고, 며느리도 어느 집의 딸이다. 여성의 이름으로 서로에게 힘이 돼야 할 사람들. 딸 노릇, 며느리 노릇에마저 불평등이 있다면 서글프지 않은가.

고미석<생활부>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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