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話 문민정부 (72)]對北 「4자회담」제의 배경

  • 입력 1998년 8월 24일 19시 22분


김영삼(金泳三)대통령과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은 96년 4월16일 제주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남북한 중국 미국 대표가 참여하는 ‘4자회담’을 제의했다.

“4자회담은 항구적 평화협정을 이룩하는 과정을 개시하기 위한 중요한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4자회담이 시작되면 광범위한 긴장완화 조치도 토의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대통령은 4자회담이 북한의 입장을 고려한 획기적 제안임을 강조했다. 4자회담 제안은 53년 휴전 이후 한국정부가 일관되게 주장해온 ‘남북 당사자원칙’의 변화를 의미하는 중대 조치였다.

그러나 4자회담은 극비추진 과정에서 회담형식에 중대한 변화가 초래됐다. 게다가 한미 양국 대통령이 4자회담을 공동제안하게 된 가장 큰 이유도 남북한 사이의 현안 해결보다는 클린턴대통령의 방한을 추진한 국내 정치적 고려가 우선했다.

유종하(柳宗夏)전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의 증언.

“4자회담 제안에 관한 미국과의 협의는 극비리에 추진됐습니다. 안보정책조정회의에서 4자회담을 추진하기로 결정한 뒤 내가 미국과의 협의를 주도했습니다. 청와대 외교안보수석과 백악관 안보담당보좌관 간에는 핫라인이 설치돼 있어요. 내가 외교안보수석이 된 뒤 앤서니 레이크 백악관 안보담당보좌관과 한달에 한번씩 핫라인을 통해 정책협의를 했는데 4자회담 협의도 주로 핫라인을 이용했지요. 비밀리에 추진한 것은 사전에 알려지면 북한의 반발 등 부작용이 예상됐기 때문이었습니다.”

유수석은 미국과의 협의진행 상황을 통일부총리나 외무장관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다. 다만 한미간에 정상회담 발표문을 합의한 뒤 초안을 관련 장관들에게 보여주고 차관들에게도 철저히 비밀에 부쳐주도록 주문했다.

한미 양국의 4자회담 공동제안 추진경위를 보면 유수석이 이처럼 비밀리에 정상회담을 주도한 이유를 알 수 있다.

다시 유전수석의 증언.

“클린턴대통령이 96년 4월 일본을 방문하기로 돼 있었는데 일정상 한국에는 올 수 없다는 게 미국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미국대통령이 일본까지 왔다가 한국에 오지 않으면 한미관계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특히 4월에는 15대 총선이 있기 때문에 야당이 한미간에 불화가 있는 것처럼 공격하면 여당이 피해를 볼 위험성도 있었지요. 클린턴대통령이 한국에도 다녀가도록 요청했지만 특별한 현안이 없는 상황에서 올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4자회담 카드를 쓰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당시 야당인 국민회의는 클린턴대통령이 일본까지 왔다가 한국에 오지 않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쟁점화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국민회의 고위 관계자의 설명.

“한미관계로 볼 때 미국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면서 한국에 오지 않는다는 것은 양국관계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클린턴대통령의 방한문제를 4·11총선에서 대여 공격 소재로 활용하기 위해 준비했었던 게 사실입니다.”

결국 정부는 남북관계 진전에 끼칠 영향보다는 국내의 정치적 고려 때문에 클린턴대통령의 방한을 성사시키기 위해 4자회담을 제안한 셈이다.

유수석은 김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속에 극비리에 미국과의 협의를 추진했다. 그런데도 관계부처 장관들이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 것은 ‘깜짝쇼’를 좋아하는 김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였다는 것이 정설.

유수석은 레이크보좌관과의 개인적 친분을 십분활용했다. 유수석은 70년대 주미대사관 참사관 시절부터 당시 미 국무부 차관보였던 레이크보좌관과 잘 아는 사이였다.

유수석은 우선 미국측에 4자회담 공동제안에 관한 운을 떼기에 앞서 레이크보좌관을 그해 2월 제주도로 초청했다.

유수석은 레이크보좌관과 한라산을 등반하는 등 2박3일간 숙식을 함께하면서 클린턴대통령의 방한 필요성을 설득했다. 결국 레이크보좌관에게서 ‘일단 추진해보자’는 긍정적인 답변을 얻어냈다. 레이크보좌관이 돌아간 뒤 협의는 외교채널을 배제한 채 유수석과 레이크보좌관 사이의 핫라인을 통해 계속됐다.

유전수석의 설명.

“미국측은 클린턴대통령이 제주에 오더라도 공항 근처에서 서너시간 머물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보였습니다. 클린턴대통령이 서귀포에 있는 호텔까지 가기 위해서는 미국 본토에 있는 헬기 5대가 함께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너무 번거롭다는 거예요. 그러나 나는 반드시 서귀포에 있는 호텔에서 정상회담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결국 미국측이 헬기 5대를 공수해 오기로 했어요. 또 당초 일본을 먼저 가기로 했던 일정도 바뀌어 제주에서 한미정상회담을 한 뒤 일본으로 가게 됐습니다. 그 바람에 일본쪽에서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지요.”

유수석은 한미정상회담 하루 전날 언론의 추적을따돌리기위해“남북대화와 북―미대화를 분리해 접근한다”는 내용의 ‘제주선언’을 정상회담에서 채택하게 될 것이라고 위장(僞裝)브리핑을 하기도 했다.

클린턴대통령의 제주방문을 성사시킨 과정은 성공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관련부처간 협의없이 극비리에 진행되는 바람에 당초 정부가 구상하던 4자회담의 성격 자체가 바뀌어 버렸다.

통일원과 외무부 등이 95년 7월 김대통령의 워싱턴 한국전 참전기념비 제막식 참석 때 마련했던 4자회담 제안은 소위 ‘2+2 구상’이었다.

즉 한국과 북한이 먼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는 협상을 벌인 뒤 정전협정 서명 당사국인 미국과 중국이 보증하는 형식으로 평화체제를 구축한다는 구상이다.

당시 김대통령의 연설문 작성에 참여했던 통일원 간부의 설명.

“북한은 중국과 체코 등 정전위원회 감시단을 추방하는 등 정전협정을 무력화하기 위해 무리한 조치들을 계속 취하고 있었습니다. 북한이 미국과의 직접 평화협정을 고집하는 상황에서 남북간에 대화의 장을 마련하는 게 급선무였습니다. 그래서 남북한이 먼저 평화협정에 합의한 뒤 미국 중국이 함께 서명하는 식의 ‘2+2회담’을 제의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의 날씨가 너무 더워서 참전기념비 제막식장에서 김대통령이 연설을 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결국 김대통령이 클린턴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그 해 광복절 때 대북 제의형식을 빌려 ‘2+2회담’을 제안하기로 합의하고 일단 연기했던 겁니다.”

그런데 김대통령이 귀국한 직후 동아일보가 “남북한이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미국이 보장각서에 서명하는 ‘2+1방식’의 한반도 평화회담이 검토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정부가 구상중인 ‘2+2방식’에서 중국이 빠져있긴 하지만 동아일보가 상당한 내용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통일원 간부출신의 한 인사는 “동아일보에 보도가 나간 뒤 김대통령이 발설자를 찾아내라고 호통치는 바람에 청와대 통일원 외무부 등 관련부처가 발칵 뒤집혔다”고 털어놓았다.

95년 8월초 광복절 기념사를 준비하기 위해 청와대 통일원 외무부 등 관련부처 국장급들로 준비팀이 구성되면서 무엇보다 보안에 신경을 쓰라는 특명까지 내려졌다.

기념사준비팀에 참여했던 인사의 증언.

“기념사에서는 우선 남북이 긴장을 완화하고 평화로운 가운데 교류와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한반도에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로 했지요. 이어 미국과의 평화협정 체결을 요구하고 있는 북한의 입장을 고려해서 남북한이 합의한 뒤 미국과 중국도 참여시키는 ‘2+2회담’을 추진하자고 제안하기로 한 것입니다. 협의결과 반대하는 부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북한에 쌀을 싣고 갔던 삼선 비너스호가 억류되는 등 남북간에 긴장이 조성되면서 광복절 기념사에서 제안하려던 ‘2+2회담’은 유보되고 말았다.

이처럼 정부 관련부처간의 협의를 거쳐 마련된 것은 ‘2+2회담’이었으나 유수석이 극비리에 추진하면서 남북한 미국 중국이 한자리에 참석하는 국제회의 형식의 4자회담으로 바뀌고 만 것이다. 회담형식이 변경된 데 대해 통일원의 불만은 대단했다.

전통일원 간부의 회고.

“‘2+2회담’은 한국의 주도적 역할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정전체제를 항구적 평화체제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남북한이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원칙을 분명히 견지한다는 것이 전제조건이었습니다. 그러나 4자회담은 한반도문제를 국제화함으로써 당사자 해결원칙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남북한이 미국 중국과 한자리에 앉더라도 북한이 미국만 주로 상대하면 한국은 들러리가 될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4자회담을 제안한 지 2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평화체제 전환을 위한 실질적인 대화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동관·김차수기자〉dk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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