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구름모자 벗기 게임<25>

  • 입력 1998년 8월 16일 20시 10분


제2장 구름모자 벗기 게임①

인생이란 때로 무서운 것이에요. 그 속엔 무자비하고 집요한 의지로 우리를 끌고가는 파악되지 않은 힘이 매복해 있답니다. 그것은 우리 자체에 붙어 있지만, 우리가 잊고 있는 곳, 닿을 수도 노려 볼 수도 없는 어떤 곳에서 작용해요. 흡사 우리의 등 같은 곳. 어쩌면 우리의 폐같은 곳. 너무나 깊은 어둠속에서만 나를 덮쳐와 결코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죠. 그처럼 무방비하고, 속수무책인 힘. 그 힘에 비하면, 우리의 생각은 언제나 짧고 논리는 어리석고 우리의 존재는 막연한 허무와 공포 속에 떠 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놓쳐버리는 억제되지 않은 감정과 우리가 아직 모르는 규정되지 않은 의지들은 모두 그의 편이죠. 고삐 풀린 감정과 의지는 우리 생을 낯선 장소로 데려다 놓는답니다. 그것은 두려운 일이죠. 우리의 생을, 우리 자신을 조종해가는 어둠 속의 다른 힘이 있는 한 저항한다는 건 단지 혼란을 가중시키는 것에 불과해요. 차라리 순순히 순종하는 일이 남아 있을 뿐이죠. 너무나 깊은 어둠 속에서, 너무나 깊은 물 속에서 그래야 하듯이요.

난, 지금…… 내 생의 아주 낯선 장소에 있어요. 이곳은 아주 어둡고 좁고 적막하고, 세상의 신문지를 다 날려보내 버릴 듯 거센 바람이 붑니다. 그러나 고통은 이미 다 지나갔어요. 다만 고통의 깊은 그늘인양 머리가 아파요. 어느 땐 하루 중의 반나절 이상을 두통으로 보내요. 뭔가에 흥분했을 때면, 뜨겁고 날카로운 철판이 뒤통수를 가르며 반쯤 밀고 들어왔다가 슬며시 나가기를 반복하는 것 같은 격렬한 통증일 때도 있지만 평소에는 뜨거운 헬맷을 쓴 것처럼 달구어진 이물질이 머리 양쪽을 누르는 듯한 무겁고 지긋한 불쾌감이에요.

지난 몇 해 동안 두통 때문에 여러군데의 병원에서 컴퓨터 단층 촬영을 했어요. 촬영실에 가면, 웃옷을 다 벗고 얇은 가운만을 입고 좁다란 특수 침상에 누우라고 하죠. 검은 비닐 가죽이 씌워진 좁다란 침상에 누우면, 머리를 좁다란 틈에 넣어야 하는데, 고무벨트로 지긋이 조이는 듯 하더군요. 촬영 기사는 내 눈에 흰 가리개를 씌우면서 꼼짝하지 말기를 지시합니다. 눈이 가려진 나는 기계적인 작동에 의해 작은 터널 같은 곳으로 천천히 밀려들어갑니다.

그런 순간이면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들었어요.

―이 촬영기계가 분쇄기처럼 나를 가루로 만들어버렸으면…… 정말이지 더는 살고 싶지가 않아. 그냥 한순간 따스하고 고운 분말이 되어버렸으면……

의사들은 한결같이 말했습니다.

―별달리 문제될만한 상처는 보이지 않습니다. 왼쪽에 생긴 크고 단단한 부위는 단지 결절일 뿐입니다. 시일이 걸리겠지만 저절로 사라질 것입니다. 약을 타 가시고 또 머리가 아프면 다시 오십시오.

나의 두통은 의사들의 눈에 보이지 않고 이해되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부어오르고, 무른 두피 아래엔 나쁜 피가 고여 있는 것이 틀림없는데, 의사들은 너무나 바빠서 점점 흐려지고 있는 나의 기억력 따위를 위해 시간을 할애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이 점점 아련해지고 모호하고 아무래도 바보가 되어가는 것만 같은데도 말이에요. 오래 생각할 수도 없고 집중할 수도 없는데 말이에요.

<글:전경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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