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여의도벚꽃구경]시작장애 10년만에 開眼 김무경씨

  • 입력 1998년 4월 8일 19시 19분


“여보, 이게 바로 벚꽃이야…. 한번 만져볼래?”

김무경씨(39·서울 성북구 장위동)는 시각장애인 아내 손순자씨(38)의 손을 잡아끌어 하얀 벚꽃무더기에 갖다댄다. 그러나 앞 못보는 아내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본다”며 얼굴을 찡그린다. 불쌍한 마누라…. 그는 더 이상 아내 앞에서 꽃자랑을 멈춘다. 그저 여의도 윤중로 벚꽃길을 손잡고 걸을 뿐이다.

한때 그 역시 시각장애인이었다. 그는 이렇게 많은 벚꽃을 태어나서 처음 본다. 햇빛에 반짝이는 흰색 꽃잎이 이렇게 예쁘다니.

79년 크리스마스날도 꼭 이런 느낌이었다. 용산 미8군 병원에서 개안수술을 마치고 나오던 날, 바늘로 눈을 찌르는 듯한 찰나의 고통이 지나가고 눈앞에 펼쳐지던 하얀 세상. 너무 황홀해 눈물을 뚝뚝 흘렸다.

김씨는 네살 때 고향(경기 포천)밀밭에서 놀다 양쪽 눈을 찔렸다. 가난했던 부모는 눈다친 아들을 병원에 데려갈 형편이 못됐다.

점점 시력이 약해지던 김씨는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부터 아예 햇빛있는 곳에선 눈을 뜰 수 없었다. 목표점이 안보여 달리기를 못하고 유난히 응달만 골라다니던 그를 친구들은 ‘사팔뜨기’라 놀려댔다. 결국 졸업도 못하고 대전맹학교로 옮겨갔다. 당시 맹학교에서는 시력을 조금이라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학생에겐 수술을 시켜줬다.

한가닥 희망도 잠시, 김씨는 “시력을 잃은 지 너무 오래돼 수술해도 소용없다”는 날벼락같은 진단을 들었다. 아! 평생 시각장애인으로 살아야 하는구나. 늘 안개 속을 걷는 기분, 꿈속에서조차 형체를 분간하지 못해 꿈이 깨도 목소리만 귀에 울렸다. 그래도 낮 밤은 구분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김씨는 열심히 점자를 익혔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서울맹학교로 옮긴 그에게 졸업할 무렵 구세주가 나타났다.

기독학생서클에서 만난 영국인 목사는 앞을 못보면서도 낙천적이고 활발한 성격인 김씨를 미8군 병원에 데리고 가 수술을 시켜줬다. 그후 찾은 시력이 1.2.

‘안마’말고는 생계가 막연했던 그는 시력이 돌아오자 다른 일을 찾아나섰지만 쉽지 않았다. 굳었던 눈동자근육이 풀리지 않아 전후좌우를 살피지 못해 공사판에서도 시장바닥에서도 실수연발이었다. 엎친 데 덮친격으로 시력도 다시 나빠지기 시작했다. 끝간 데 없는 추락. 그때 같이 일하던 호텔서 안마사로 만난 지금의 아내는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85년 결혼할 무렵, 시력도 다시 1.0으로 돌아왔고 이듬해엔 예쁜 딸도 얻었다.

먹고살기 바빠 남들처럼 한가한 나들이라곤 다녀본 적 없는 김씨부부. 여의도 윤중로 벚꽃길이 그리도 장관이라는데 엎어지면 코닿을 곳인데도 선뜻 나서질 못했다. 오늘은 모처럼 김씨부부가 함께 쉬는 날.

“앞이 안보였을 때 세상은 온통 분노와 어둠뿐이었지만 이제 눈을 뜨니 내 주변 모든 것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다”는 그에게 개안은 다름아닌 세상에 대한 눈뜸이었다.

알뜰살뜰 돈을 모으면 시각장애 어린이를 위한 봉사활동을 하고싶다는 그는 시각장애라는 상실의 경험 끝에 찾아온 모든 일상에 대한 감사함으로 하루하루가 봄꽃처럼 충만하다고 환하게 웃는다.

〈동행취재〓허문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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