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뷰]「크래쉬」/자동차와 에로틱 야릇한 함수관계

  • 입력 1998년 3월 2일 20시 08분


신혼부부와 초보운전자를 대비시킨 우스갯소리가 있다. 소리만 요란하다, 자꾸만 타려 한다 등등. 아닌게아니라 자동차와 섹스는 가속도가 붙는다든지, 생체내 산화반응을 일으킨다든지 하는 공통점이 있는 것도 같다.

‘크래쉬’는 자동차와 섹스, 그리고 극단으로 치닫는 현대문명의 관계를 치밀하고도 끈질기게, 노골적으로 파헤친 영화다. 그래서 두차례나 공연윤리위원회에서 심의보류 판정을 받았고 수입사인 신필름이 몇몇 장면을 자진삭제한 뒤 가까스로 상영허가를 받았다.

사실 반듯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보기에 이 영화는 도저히 말이 되지않는 줄거리로 가득 차있다.

방송사PD인 제임스 발라드(제임스 스페이더 분)는 여의사 헬렌(홀리 헌터)의 차와 충돌사고를 일으킨 뒤 다시 만나 충동적 성관계를 갖는다. 제임스는 헬렌에 이끌려 “사람과 기계의 충돌에서 에로틱한 힘이 발생한다”고 믿는 전직 과학자를 만나게 되고, 이들은 일부러 자동차 충돌사고를 일으킨 뒤 섹스를 하는 기묘한 쾌락에 빠져드는데….

‘크래쉬’의 극본과 감독을 맡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는 ‘플라이’‘비디오드롬’ 등에서 테크놀러지와 인간을 집요하게 충돌시킨, 그래서 영화를 만들 때마다 한번도 조용히 지나간 적이 없는 문제작가다.‘크래쉬’를 말도 안되는, 미친 영화라고 무시해버릴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영화속 등장인물들은 배울 만큼 배운 여피(Yuppie)족이다. 말하자면 전형적 후기산업사회의 커플인 셈. 일 돈 명예 등 가질 것을 다 가져도 허망한 이들이 마지막으로 빠져드는 것이 섹슈얼리티다.

그렇다면 왜 자동차 충돌일까. 크로넨버그에 따르면 현대사회에서 자동차는 단순한 기계가 아니다. 미국의 10대에게 자동차 소유란 일종의 권력이며 섹스능력을 가졌음을 의미할 정도다.

주인공들은 기계문명의 총아인 자동차를 고의로 충돌시킴으로써 현대사회의 규칙을 깨뜨리고 조롱한다. 그것도 자본만이 움직일 수 있는 스피드를 통해. “가속도를 지닌 근대이성이 인간생활의 모든 측면을 폭력적으로 가속화시켰다”며 이를 일러 파시스트적 속도라고 칭한 철학자 질르 들뢰즈를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그들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프로이트가 욕망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대상은 죽음뿐이라고 했듯이 영화속 인물들의 삶의 본능(에로스)과 죽음의 본능(타나토스)은 맞닿아 있다. 이들에게 자동차 충돌은 성적 전환점이고 삶의 원동력이다.

주인공들은 부서진 차 안팎에서 섹스를 나누며 일체감을 느낀다. 극중 제임스는 “정말 사고가 났다고 생각하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편안함이 깨질까봐 걱정을 하며 살지만, 편안함 속에서 진정 사라지는 것은 불꽃튀는 쾌락과 창조력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적어도 도덕성이나 ‘바르게 살기’는 아니다. 이미 무감각해진 인간에게 인간성이란 의미가 없다.

‘크래쉬’를 보면 후기산업사회의 속성들이 인간을 얼마만큼 황폐화시킬 수 있는지, 끝간데 없이 섹스와 쾌락을 추구하다 보면 인간이 얼마나 비틀릴 수 있는지 느낄 수 있다. 반면교사(反面敎師)인가.

영화는 악, 소리가 날 만큼 노골적이다. 동성애장면은 삭제됐지만 체모가 보이는 누드, 여성생식기 같은 상처자국, 가학 피학성 카섹스는 그대로 등장한다.

96년 칸영화제 심사위원장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이 이 영화에 심사위원특별상을 주는 이유를 대담하고 뻔뻔스럽기 때문이라고 했고, 장내엔 박수와 야유가 교차했었다. 14일 개봉. 18세미만은 볼 수 없다.

〈김순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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