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北韓의 워싱턴 입성

  • 입력 1997년 11월 27일 20시 03분


북한과 미국은 26일 워싱턴에서, 그것도 미국 국무부에서 준고위급 회담을 가졌다. 파격적이다. 양측이 논의한 미국의 대북(對北) 경제제재조치나 테러국가지정 해제, 미사일 협상의 조속한 재개, 서로간의 연락사무소 개설문제 등 현안에 대해서는 특별한 진전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 회담은 과거 어느 북―미(北―美)회담보다도 양국관계의 급진전을 시사하고 있어 주목된다. 미국은 지금까지 유엔주재 북한외교관들이나 미국을 방문한 평양 관리들이 뉴욕에서 25마일 이상 떨어진 곳을 여행할 때는 특별히 허가를 받도록 규제해 왔다. 구(舊)소련이 모스크바 주재 미국대사관 직원들에게 그같은 규제를 취해 미국도 상호주의원칙을 적용, 북한도 그 대상이 된 것이다. 이에 따라 북한측 인사들은 연락사무소 부지 물색이나 학술세미나 조찬기도회 참석 명목 등으로 여러 차례 워싱턴을 방문한 적은 있으나 회담을 위해 워싱턴에 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동안 미국에서 열린 북―미회담 장소는 뉴욕이었다. 미국이 미수교국이자 적성국으로 분류한 국가의 대표와 수도 워싱턴의 국무부에서 회담한 전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미국측에서는 북한이 내달 9일 4자회담 본회담에 참석하기로 한데 대한 일종의 성의표시라며 의미를 축소하고 있으나 이처럼 전례없는 회담의 배경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워싱턴포스트지는 미국이 4자회담 참가조건으로 북한에 식량 1백만t을 지원하기로 했다고 보도하는 등 최근의 북―미간 「뒷 거래」에 의혹을 제기했다. 만일 이번 워싱턴회담도 어떤 외교적 거래의 결과라면 떳떳하지 못하다. 북―미관계 개선은 북한의 개방과 개혁을 촉진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 북한을 가급적 국제무대로 끌어내고 교류를 넓혀 고립 폐쇄정책에서 벗어나도록 유도해야 한다. 그러나 미국이나 일본 등 우방이 남북관계의 현실을 무시하고 대북관계 개선에만 몰두한다면 자칫 한반도 전체의 안정을 위태롭게 할지도 모른다. 우방의 대북관계는 항상 남북관계의 진전 속도에 맞춰 적절하게 수위를 조절해야 한다. 북―미관계에서 한국은 제삼자적인 입장이 아니다. 그러잖아도 내달의 4자회담 개최 합의는 미국이 한국의 등을 떼밀다시피 해서 이루어졌으며 이번 북―미간 워싱턴 준고위급 회담도 한미(韓美)간에 깊은 논의가 없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반도문제의 직접 당사자인 한국이 이처럼 미국이나 다른 우방의 대북관계에 소극적으로 끌려다닌다면 남북관계에서도 주도적 역할을 하기 어렵게 된다. 대북관계에 관한 한 어느 나라와도 외교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공조체제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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