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석제의 세상읽기]에라! 몹쓸 세탁기

  • 입력 1997년 10월 11일 07시 45분


시골에서 혼자 사시는 셋째 할머니께 누가 세탁기를 사드렸나 보다. 세탁기를 써보시더니 이렇게 논평하셨다. 『세탁기가 빨래를 다해주니까 더 자주 옷을 갈아입게 돼. 더 자주 갈아 입으니 더 자주 빨게 되잖느냐. 더 자주 빠니 옷이 더 빨리 닳더구나. 그러니 옷을 또 사야 하고, 옷장은 얼마나 비좁아지니. 세탁기가 그냥 생기나, 세탁기 돌리는 전기가 그냥 나오나. 몹쓸 것이 세탁기라는 물건이더구나』 어쨌든 시간이 많이 남는 할머니, 그 시간에 화투를 치신다. 나이 일흔 여섯, 여든 넷, 여든 여덟의 할머니들이 매일 할머니의 방에 모인다. 장롱 밑에 있는 화투판을 펼치면 한눈에도 나이를 먹을대로 먹은 화투가 나온다. 판돈은 할머니들의 주머니에서도 쌈지에서도 나오지 않고 화투판 옆에 늘 신문지로 덮여 있다. 신문지를 들추면 동화처럼 수북이 쌓인 10원 짜리 동전을 구경할 수 있다. 그들은 화투를 치기 전에 그 판돈을 대범하고 공평하게 나눠가진다. 화투가 끝나면 10원 짜리를 다시 한군데로 모아 신문지로 덮어둔다. 『아이구, 10원 짜리를 어디서 이렇게 많이 모으신 거예요?』 내가 신문지를 들추다가 놀라 물었다. 『너희 어릴 때 저금통에 넣어둔 것을 찾은 것도 있고 저 할망구들이 손자들이 버린 것을 주워온 것도 있고… 요새 10원 짜리 동전 쓸 데가 어디 있니. 못 쓰는 줄 알았더니 이런 데 소용이 되는구나』 노름은 몹쓸 것이라고 생각하는 할머니, 마흔을 바라보는 어린 손자에게 부끄러운지 말이 길어지신다. 나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일흔 넘은 사람들에게 고스톱은 무료를 이기고 치매를 방지하는 데 쓸모가 있을 것이라고 할머니께 말씀드렸다. 할머니에게서 돌아오는 길, 고속도로 톨게이트 앞이다. 내 동행은 톨게이트 앞에 늘어선 차들을 이리저리 헤집어가며 앞으로 끼여드는 차를 향해 중얼거린다. 『왜 저 사람들은 저렇게 조금이라도 빨리 가려고 할까. 남보다 돈을 더 빨리 내고 싶어서? 아, 아까부터 사고를 무릅쓰고 미친 놈처럼 달려온 게 아까워서 저러는구나. 나도 저러다가 사고나서 면허 취소당했는데…』 자동차는 사람을 빠르게 움직이게 한다. 그게 자동차의 쓸모인데 너무 빠르게 움직이게 하면, 가령 사고라도 나서 유난히 빠른 인생을 살게 하면 몹쓸 게 자동차라는 물건이겠다. 할머니, 제 말도 맞지요? 성석제〈소설가〉 ―세상읽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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