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하일지판 아라비안 나이트(435)

  • 입력 1997년 7월 10일 08시 18분


제8화 신바드의 모험 〈88〉 『오, 성자님, 마침내 눈을 뜨셨군요!』 내가 눈을 뜨자 공주는 기쁨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습니다. 『오, 내 사랑 공주님! 당신만이라도 제발 저를 성자라고 부르지 말아주십시오. 저는 한갓 오갈 데 없는 나그네일 뿐이랍니다. 기구한 운명을 피하지 못하여 공주님처럼 고귀한 분을 만나 마음의 병을 얻었을 뿐이랍니다』 『오, 그렇지만 당신은 저에게 성은을 베풀어주신 분입니다. 저를 낳아준 것은 부모님이지만 저를 여자로 태어나게 해주신 것은 당신이었습니다. 오! 당신이 저를 여자로 만들어주신 그날밤을 저는 잊지 못한답니다. 당신이 성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그런 황홀한 일이 가능했겠습니까? 당신이 성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저의 몸에 그 환희의 불꽃을 지펴놓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공주가 이렇게 말하자 나는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오, 제발! 성은을 베푸신 것은 제가 아니라 공주님이시랍니다. 그날밤 공주님께서 저에게, 이 지친 나그네에게 성은을 베푸셨던 것입니다. 이 천하고 불량한 길손은 공주님의 그 황홀한 성은을 잊지 못하여 이렇게 병이 난 것입니다. 저에게는 이 병마저도 감미로울 뿐이랍니다』 내가 이렇게 말했지만 공주는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제가 성자님께 성은을 베풀었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요? 게다가 그날밤 성자님께서는 저에게 더없이 소중한 선물을 남겨 주셨는데도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고난 공주는 나의 손을 잡아 끌어가더니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게 하였습니다. 그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러고보니 공주는 그 사이에 임신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놀란 눈을 한 채 무어라 말을 하지 못하고 있으려니까 공주는 그 너무나도 귀엽고 사랑스런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이 아이가 성자님의 씨앗이라는 걸 어떻게 아느냐고요? 그건 다만 직감이에요. 그러나 저는 그걸 믿어요. 왜냐하면 그날밤, 그 황홀한 순간에 저는 알라께 기도드렸답니다. 성자님의 씨앗을 잉태하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제가 이렇게 기도한 바로 다음 순간 성자님께서는 저의 몸 속 깊은 곳에 그 뜨거운 씨앗을 뿌려주셨답니다. 그때 저는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던 것이랍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공주는 다시금 쌩긋 웃었습니다. 그 귀여운 미소를 보자 정말이지 나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억누를 수 없었습니다. 얼마간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는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공주와 헤어진 뒤 나는 조금씩 건강을 회복해갔습니다. 기력을 되찾으면서 나는 매일같이 바닷가를 혼자 산책하곤 했습니다. 내가 바닷가를 거닐고 있노라면 어부들이 축복을 받기 위하여 나에게로 달려와 무릎을 꿇기도 하였습니다. 나는 비록 성자가 아니긴 하지만 진심으로 그들에게 축복을 내려주곤 했습니다. 나의 그 사랑스런 공주님의 뱃속에서 꼼틀거리며 자라고 있을 아이를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글:하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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